항목 ID | GC02400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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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규복 |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경상북도 안동의 역사와 문화.
[개설]
경상북도 북부 중앙,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안동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거점 도시로서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 풍산읍 마애리 구석기 유적을 비롯한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남아 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다.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안동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부터 출발한다. 풍산읍 마애리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찍개류, 몸돌 등의 후기 구석기 유물은 구석기시대부터 안동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 준다. 낙동강 연안에 있는 이 유적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의의를 가진다. 신석기시대의 유구나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2.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는 안동 전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남후면 하아리 무문토기산포지, 서후면 저전리 청동기시대 저수지, 임동면의 안동 수곡리 바위그림, 예안면 신남리 고인돌과 와룡면 가구리 선돌을 비롯한 안동 지역 곳곳에 있는 고인돌과 선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저전리 청동기시대 저수지는 우리나라 관개 농업과 벼농사의 발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수곡리 바위그림은 넓적한 바위에 말굽·새·사람 발자국·윷판 등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 구멍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흔적이다.
[고대]
1. 삼국시대
삼국시대 안동 지역은 3세기 전반 신라에 편입되어 고타야군(古陀耶郡)이라 하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242년(조분왕 13) 고타야군에서 곡식을 바쳤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안동 지역은 신라 북부의 중요 거점이 되어 500년(지증왕 1)에는 왕이 이 지역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설치했다는 임하 지역의 굴화현(屈火縣)과 예안 지역의 매곡현(買谷縣)은 삼국시대 안동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장이었음을 알려 준다. 삼국시대 유적은 대부분 고분(古墳)으로 주로 낙동강 연안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2. 남북국시대
남북국시대 초기의 안동은 서쪽과 남쪽은 상주(尙州), 동쪽과 북쪽은 삭주(朔州)에 속해 있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 제도 개편 때 고창군(古昌郡)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직녕현(直寧縣, 지금의 일직면)과 고구현(高丘縣, 지금의 의성군 북부), 일계현(日鷄縣) 등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이 시기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유적은 불교나 고분과 관련된 것이다. 안동 지역 곳곳에는 불상과 불탑이 있는데, 특히 집중 분포된 전탑(塼塔)은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안동 지역만의 특징이다. 무덤 가운데 안막동 고분은 굴식돌방무덤으로 경주-안동-영주를 연결하는 문화 교류 통로의 한 면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
후삼국 통일기부터 고려 말까지 안동 지역은 고려왕조에 적극 협조하였고, 충성을 다한 고장이었다. 태조 왕건·충렬왕·공민왕은 전쟁과 관련하여 안동에 와서 머물렀는데, 당시 안동에 있었던 국가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안동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지면서, 그 의미가 거듭 부각되어 왔다.
후삼국 통일기에 태조 왕건이 견훤과 안동에서 패권을 다툴 때, 안동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안동이라는 지명이 부여되고, 국사와 관련하여 호족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 중심에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씨(金氏), 권씨(權氏), 장씨(張氏) 등이 있었다.
고려 말기 충렬왕과 공민왕이 안동에 와서 머문 일은 안동 지역의 위상을 높이고, 안동 문화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충렬왕은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안동에 와 있었고, 공민왕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에 머물면서 홍건적을 물리쳤다. 이 무렵 고려의 상류층 문화가 들어와 안동 문화의 한 흐름을 이루었고, 공민왕이 안동을 다녀 간 뒤로 안동 사람들의 중앙 정계 진출이 더 활발해졌으며, 이들과 혼인 관계로 얽힌 외지인의 안동 유입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주자학 중심의 학문 활동이 진흥되었다.
고려시대 안동 일원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관련 문화 유적이 곳곳에 있다. 대형 마애불로 유명한 안동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 일명 제비원 석불)은 대규모의 불교도 집단이 안동 지역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봉정사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유명하다. 한편 녹전면 서삼리 고려벽화고분은 성수도(星宿圖)와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돌방무덤으로 유명하고, 정하동 기와가마에서는 기와 제작이 활발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안동은 특히 퇴계 이황이 활동하던 때부터 사림(士林)의 본고장이 되었다. 퇴계는 성리학을 체계화하는 한편,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 냄으로써 이후 안동은 성리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유교 이념에 따라 많은 집성촌(集姓村)이 형성되어, 집성촌을 중심으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다량의 저술(著述)이 이루어졌다.
성리학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예학(禮學)도 발달하여 유교 의례가 정교하게 행해졌다. 안동에 종가(宗家), 서원(書院), 재실(齋室), 정자(亭子)가 많은 것은 성리학적 가치를 실현할 유교 문화가 융성했다는 증거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안동에는 과거 시험 합격자가 서울 다음으로 많았다. 이들은 안동을 두드러진 양반 사회로 만들었으면서도 기층민들을 부드럽게 다스려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에서 기층민들이 양반과 선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해도 양반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시대 안동의 민중들은 안동차전놀이·안동놋다리밟기·하회 별신굿 탈놀이·성주신앙 등과 같은 민속을 잘 전승하여 양반들에 의한 유교 문화와 민중들에 의한 민속 문화가 함께 공존하였고,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근대]
안동 지역은 민족 수난기에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가장 많은 순절자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다. 그것은 퇴계학맥을 계승한 인물들이 강한 의리 정신과 대의명분을 가지고 향촌 사회를 유지하면서, 민족 모순에 대해 역사적 책임감을 통감하고 몸 바쳐 나선 결과이다. 1894년 갑오변란에 대응하여 첫 의병 항쟁이 안동에서 일어났으니, 이를 갑오의병이라 부른다. 이후 중기 의병과 후기 의병 시기까지 항쟁은 계속되는데, 의성김씨·안동권씨·전주류씨·하회류씨·진성이씨 등 안동 지역의 유력한 종가나 양반 가문의 인물들이 주역이 되었다.
1910년에 나라를 잃게 되면서, 이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은 순절로 나타났다. 순절자는 전국적으로 60명 정도인데, 안동 지역과 관계된 인물이 이만도(진성이씨)를 비롯한 10명으로 가장 많다. 3·1운동 당시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기독교도와 학생들의 역할이 두드러졌지만, 안동 지역에서는 양반 가문의 역할이 특별하였다. 예안의 경우에는 퇴계의 후손인 진성이씨 문중이 절대적으로 많이 참가하였고, 안동에서는 교회와 더불어 김흥락의 제자인 송기식이 한 축을 맡았다.
국권을 빼앗긴 뒤 국내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낀 안동 지역 사람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망명은 주로 문중이나 학맥, 혼맥으로 결속되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의성김씨 집성촌인 안동 내앞마을은 당시 주민 수가 700여 명이었는데 약 150명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 밖에 고성이씨(이상룡), 전주류씨(류인식), 진성이씨(이원일), 흥해배씨(배영진), 안동권씨(권기일) 등의 문중이 망명하여 경학사, 공리회, 부민단, 백서농장, 한족회,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하였다.
민족 수난기에 대응하는 양상은 다양하다. 한편에서는 목숨을 바쳐 순국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침략자의 앞잡이로 살아간 인물도 있다. 그러나 안동 지역의 사람들, 특히 배우고 가진 자들은 역사적 책임을 통감하여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가진 자들이 시대적 과제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현대]
1945년의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은 컸지만 그만큼 혼란도 컸다. 안동의 해방 정국 역시 좌익이 주도한 인민위원회와 우익이 주도한 대한독립촉성회 계열의 대립과 갈등으로 혼란 자체였다. 이러한 갈등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배가되었다. 보도연맹사건·부역사건과 같은 희생 사건이 잇달았고, 1950년 8월 1일에는 북한군이 안동 시내로 밀려들자 한국군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강을 지연시키기 위해 안동교를 폭파하여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한국군 장교와 사병 700여 명이 북한군의 총격에 희생되거나 강을 건너다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시련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도 안동은 전통을 잘 지키고, 새로운 것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한 결과 문화의 도시, 교육의 도시, 관광의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전국 최다의 박물관을 보유한 문화의 도시가 되었고, 인문학 자료와 역량이 축적되면서 한국국학진흥원·안동독립운동기념관과 같은 연구 기관을 갖춘 수준 높은 도시로 성장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문화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들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1999년의 영국 엘리자베스여왕 방문을 비롯한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개최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안동은 옛것을 잘 지켜 내는 도시이다. 여기에는 정신적 유산과 물질적 유산이 포함된다. 특히 안동은 정신문화를 잘 갈무리하여 정신문화의 수도로 거듭나면서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