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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1290
한자 近代 場市- 變遷- 保寧- 中心地 移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윤현

[정의]

근대부터 현대까지 충청남도 보령 지역 근대 장시의 변천과 중심지 이동.

[보령의 장시권역과 이용 현황]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1차산업[농업, 어업, 임업] 위주의 자급자족적 경제가 주를 이루었다. 국토의 70%가 산악으로 이루어져 도로망이 열악한 관계로 상공업의 발달이 어려웠고, 일부 고을의 관아 또는 지방 거점 고을에만 시장이 열려 물물교환 행위만이 간간히 있었을 뿐이다.

조선 후기인 19세기부터 전국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보부상과 같은 유통 관련 직업이 생겨나 지방의 장시들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보령 지역 또한 서쪽으로 서해가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대천천, 웅천천 등 크고 작은 개천 주변으로 평야가 발달하여 농산물이 풍부하였다. 게다가 보령 앞바다에는 70여 개의 유·무인도가 있으며 이 섬을 중심으로 어획물과 기타 수산물이 풍부하여 육지의 큰 개천에 몇몇 포구를 통하여 물자유통의 장이 열리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지금까지도 대천장[3일, 8일]과 웅천장[2일, 7일]을 중심으로 5일장이 열려 보령시민과 청양, 홍성, 서천 지역민들까지 이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 보령의 장시]

조선 후기의 보령 지역은 보령현남포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보령현에는 읍내장[1일, 6일], 대천장[3일, 8일], 옹암장[2일, 7일], 수영장[2일, 7일]이 있었으며, 남포현에는 대천장[4일, 9일]과 간치장[1일, 6일]이 있었다. 두 지역의 장시 중 보령현만이 읍치에서 10리[약 4㎞] 안에 있는 읍내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남포현의 경우 읍치가 아닌 웅천읍 수부리에 있던 옛 읍치 근처에 있는 곳에 대천장이 설치되었다. 두 지역의 장시는 5일에 한 번 열리는 5일장의 형태이며, 서쪽에 바다가 접해 있어 주로 해산물과 농산물을 취급하였다. 남포 지역의 경우 간치장을 중심으로 서천 한산, 부여 홍산과 모시를 취급하는 저산8읍에 속하였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보령 지역은 농산물과 더불어 장석, 석탄, 천문동, 민어, 석두어, 청어, 조개, 굴, 김, 미역 등의 물품을 거래하였다. 남포 지역 또한 바다에 접해 있는 보령 지역처럼 해산물, 농산물과 더불어 남포 지역에서 나는 특산품인 오석(烏石)과 모시가 생산되어 유통되었다.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보령의 장시]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조약을 맺으며 개항을 하면서 조선의 장시와 상업의 모습이 변화하게 된다. 개항 이후 개항장이 생기면서 외국상인들이 입항하였지만 개항장 4㎞ 이내로 상행위가 제한되어 수입품 파급에 보부상들의 행상활동은 필수적이었다. 보부상의 이러한 활동은 수입품을 운송, 판매하였고 한편으로는 농촌 지역의 토산품인 미곡을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시장의 형성과 더불어 보부상의 역할도 빠질 수가 없었는데, 보령의 경우 홍주를 중심으로 주변 6개 고을에서 활동하는 원홍주6군상무사가 활동하였으며, 남포는 모시를 취급하는 저산8읍상무사가 활동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가 되고 지방제도가 바뀌면서 보령현남포현은 각각 보령군, 남포군으로 충청남도 소속이 되었다. 1900년에는 오천군이 새로 신설되면서 기존 보령 지역 장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저산8읍상무사가 활동했던 남포군은 대천장과 간치장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원홍주6군상무사가 활동한 보령군 지역은 새롭게 주교장이 새로 열리면서 보령 앞바다에 섬과 육지의 상권을 이어주는 상업유통망이 만들어졌다.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시장의 운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제는 전국에 정기시장의 유용성을 경제 침탈 정책으로 활용하여 정기시장에 대한 장려정책을 시행하였다. 보령 지역 역시 기존의 장시를 계승하여 시장이 열렸는데, 특히 오천군에 설치되었던 수영장과 보령현에 있던 읍내장이 1914년 행정 통폐합 이후 홍성군으로 바뀐 옹암진과 청소장으로 이어졌다. 또한 남포에 있던 대천장이 기존의 대천리에서 대창리로 이전하고 개시일 또한 2일과 7일로 바뀌었다.

1920년대 들어서 보령군청이 소재하고 있는 대천면 대천장이 성장하게 된다. 대천장은 당시 군산항의 상령역에 있고 일부는 인천과의 상거래 관계를 갖고 있어 인천과 군산으로부터 상품 유입이 활발하였다. 또한 서해 연안의 어획물과 수산물을 인천, 군산뿐만 아니라 홍성 광천, 청양, 강경 등지로 수송 판매하는 중간 역할을 할 수 있어 대천장은 더욱 발전하였다.

[보령 장시의 변화]

보령 지역 시장의 변화는 행정구역 변화와 교통수단의 발전 등의 요인에 따라 영향을 미쳤다. 1914년 3월 1일 일제에 의한 지방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보령군, 남포군, 오천군이 보령군으로 통폐합되었고, 통폐합된 보령군의 중심지는 1914년 10월 1일 주포면 보령리에서 대천면[현 대천1동]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령시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 정치적인 혼란과 전쟁의 영향으로 정기시장의 활동이 감소되었지만, 전후 복구 사업과 더불어 1980년대까지 무연탄 광산이 운영되면서 인구증가로 시장이 활성화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도시 중심의 산업화와 더불어 1995년 보령 도농통합시의 출범으로 인한 지역행정 통합, 보령시청, 경찰서, 소방서 등의 관공서 및 장항선 직선화에 따른 대천역 이전,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대천해수욕장을 비롯한 관광산업 활성화에 따른 서비스업 중심 시장 형성 등의 요소로 전통적인 시장이 쇠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보령의 장시]

현재 남아 있는 보령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는 3·8일에 열리는 대천장과 2·7일에 열리는 웅천장이다.

먼저 대천장은 대천동 KB증권 건물 뒤쪽에 서는데, 장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상인들과 주민들이 모여 장을 이룬다. 하지만 시장의 공간이 적어 좌판을 설치할 수 없을 시 길 건너편 상설시장인 중앙시장한내시장으로 이동하여 좌판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트럭에 상품과 판매장비를 가지고 다니며, 날짜에 맞춰 보령시 읍·면에 거주하는 주민들 또한 자신이 팔 물건을 가지고 나와 장사를 한다.

트럭을 소유한 상인들이나 주민들은 보령뿐만 아니라 홍성과 청양, 심지어 예산에서도 오는 경우가 있는데 홍성, 청양, 서천, 예산 지역 장날에 맞춰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대천장에서 정기시장을 보는 상인들은 옛 보부상의 후예를 자처하는데, 옛 홍주 주변 6개 고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원홍주6군상무사의 대천임소가 있어 시장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웅천장은 원래 남포현의 중심시장으로 지금의 웅천읍 대천리에 있었다. 하지만 1928년 웅천면사무소의 이전과 함께 현재의 위치인 대창리로 이전하였고, 장항선 웅천역 설치와 보령-서천 간 도로망이 개통되면서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웅천장은 과거 장옥들을 상설 점포화하여 상설시장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지금도 대천장과 함께 5일장다운 장이 운영되고 있다. 대천장과 웅천장 이외에도 명맥을 유지하는 시장으로는 오천면에 열리는 오천장과 주산면에 열리는 간치장이 있다. 그 외에 청라장[청라면], 청소장[청소면], 주포장[주포면], 주교장[주교면], 우시장[대천2동], 남포장[남포면]이 있다.

[보령 장시 콘텐츠 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

조선 후기부터 명맥을 이어온 보령 지역의 장시다운 장시는 대천장과 웅천장 2개뿐이며, 지금도 쇠퇴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두 장시가 유지할 수 있는 공통적인 요인은 바로 보부상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대천장은 현재까지도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원홍주6군상무사의 임소가 있는 장시이며, 지금도 상인들의 일부가 보부상단에서 활동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웅천장의 경우 웅천장이 있는 대창리에는 돌을 조각하는 석재가공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과의 연계 활동을 장시 활성화의 콘텐츠로 활용한다면 추후 새로운 형태의 장시 모습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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