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56
한자 白文節
이칭/별칭 빈연(彬然),담암(淡巖),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269년 - 백문절 원종(元宗)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표문(表文)을 지음.
활동 시기/일시 1278년 - 백문절 권세가 자제의 관직 임명에 불응하여 투옥 후 석방
활동 시기/일시 1280년 - 백문절 귀양 간 심양 등을 석방하게 함.
몰년 시기/일시 1282년연표보기 - 백문절 사망
사당|배향지 옥산사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624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신안사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포
대표 관직 국학대사성|보문각학사

[정의]

고려 후기 보령 출신의 문신.

[개설]

백문절(白文節)[?~1282]의 자는 빈연(彬然), 호는 담암(淡巖)이다. 남포(藍浦)[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읍 일대] 출신으로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굽힘이 없던, 지조와 절개가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가계]

본관은 남포, 아버지는 좌복야(左僕射) 백경선(白景瑄), 아들은 백이정(白頤正)[1247~1323]이다.

[활동 사항]

신라 때의 간관(諫官) 백중학(白仲鶴)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高宗)[재위: 1213~1259]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서사인(中書舍人)·이부시랑(吏部侍郎)·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지냈고, 1269년(원종 10) 원종(元宗)[재위: 1260~1274]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표문(表文)[예전에 사용하던, 외교 문서의 하나]을 지었다. 원종은 임연(林衍)[?~1270]에 의하여 폐위되었다가 원나라의 도움으로 복위한 상황이었지만, 표문에는 그 사실을 감추고 병으로 왕위를 물려준 것처럼 기록하려 하였는데, 이때 백문절이 붓을 놓고 울면서 간(諫)하자 왕이 스스로 깨달아서 표문에 사실을 그대로 쓰게 하였다.

1278년(충렬왕 4) 사의대부(司議大夫)로서 권세가의 자제들이 관직에 임명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아 왕의 노여움을 사 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다. 또한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어 1280년에 왕에게 진언하여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귀양간 시사(侍史) 심양(沈諹)[?~?] 등을 석방하게 하였다. 또한 그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원부(元傅)와 함께 진사(進士)를 뽑아 이백기(李伯琪) 등 33인을 급제하게 하였다. 아들 백이정의 묘비에 기록되기를 백문절의 집안은 대대로 남포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백문절이 문장이 훌륭하였고, 게으르고 옹졸한 것 같았으나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충청도 남포현 인물조에는 백문절이 붓을 잡으면 거침없이 글이 나와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 권근(權近)[1352~1409]은 백문절과 백문보(白文寶)[1303~1374]를 가리켜 “두 분의 백문학(白文學)이 요순(堯舜)과 육경(六經)의 다스림을 미루어 말하였다”고 하였다[『양촌문집(陽村文集)』 중간 서문].

[학문과 저술]

『동문선(東文選)』에 「화암사운제(花岩寺雲梯)」, 「방산사(訪山寺)」, 「당요(唐堯)」, 「무광(光武)」, 「대사성유경양감시시원표(大司成柳璥讓監試試員表)」 등의 시와 글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보령의 옥산사(玉山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