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67
한자 抗日義兵戰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894년 - 항일의병전쟁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등에 항의하여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항일의병전쟁 시작
발생|시작 장소 충청남도 보령 지역
성격 항일투쟁
관련 인물/단체 김석원|김화식|백관형|백만기|오경춘|유준근|윤창영|이규상|황영수|황재현

[정의]

개항기 일제 침략에 대항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 전개한 항일 무장 투쟁.

[역사적 배경]

개항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894년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등에 항의하여 일어난 전기 의병은 단발령 공포 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제천의병과 김하락(金河洛)[1846~1896]의 이천의병을 비롯하여 춘천, 강릉, 홍주, 진주 등지의 의병 활동이 있다. 한말 의병은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등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재기되었다.

중기 의병은 1905년 9월 러일강화조약이 조인될 무렵부터 구체적인 투쟁상을 보여 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은 남한 지역의 산간 지대를 중심으로 투쟁을 강화하였다. 중기 의병에서 가장 큰 전투와 희생을 치른 의병대가 충청남도 홍주의병이다.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일로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이어 정미조약으로 인하여 통감부가 내정간섭권을 대폭 강화함에 분개하여 일어났다. 후기 의병은 일본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당하자 군인들이 항거하여 대거 의병진에 가세하면서 일본과의 전면 전쟁의 성격을 띠는 대일 항전으로 확대되었다.

[경과]

충청남도 지역에서의 의병 역시 의병의 전 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기 의병기 충청남도 의병은 홍성을 비롯하여 청양, 서산, 당진, 보령 등 서부 지역의 인물들이 참여하였으며, 활동 또한 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진 특성을 갖는다.

보령 출신으로 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은 10여 명 정도 확인된다. 김석원(金錫元)[1862~?], 김화식(金華植)[1866~1943], 백관형(白觀亨)[1861~1928], 백만기(白萬己)[1883~1961], 오경춘(吳敬春)[1874~?], 유준근(柳濬根)[1860~1920], 윤창영(尹昌榮)[1889~1988], 이규상(李奎相)[1883~?], 황영수(黃英秀)[1855~1919], 황재현(黃載顯)[1848~1903] 등이다. 이들 중 정미의병에 활동한 의병으로는 김석원, 백만기, 윤창영, 오경춘, 이규상 등이다.

김석원은 1907년 11월부터 1908년 3월까지 충청남도 일대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이라는 형을 선고받았다. 백만기는 1908년 3월 지석홍 의병대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일대 특히 남포, 풍년동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후에는 이종갑(李鍾甲)[1874~1932], 윤창영 등과 함께 남포군 불은면에서 금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경춘은 1908년에 충청남도 보령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규상은 1909년 4월 23일 충청남도 일대 특히 홍성의 송지곡면 금곡리에서 오양선(吳良善)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와 같이 정미의병기에 가담하여 활동한 인물들 중 보령 출신 의병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보령 출신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한 인물로는 백관형 등이 확인된다. 백관형은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면서 홍주의병에 참전하여 참모로 활동한 인물이다. 특히 백관형은 의병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 때에도 김백원(金百源)[1859~1935] 등과 협의하여 독립 요구 취지문을 작성하여 총독에게 보내고 보신각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취지문을 낭독하는 한편, 파리장서[독립청원서]에 유림 대표의 일원으로 서명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해산으로 격렬해진 정미의병은 의병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기존의 의병들이 분산적으로 활동하였던 것과 달리 정미의병은 연합전선으로 모색되는 등 초기의 단점들이 보완된 형태로 체계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은 특별한 의미를 갖으며, 그리고 홍주의병은 충청남도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이지만, 다른 지역의 의병 봉기에 영향을 크게 미쳤으며,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뿐만 아니라 3·1운동으로 그 독립정신을 계승시켰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