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조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707
한자 楊州 趙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54년 - 조존성 출생
입향 시기/일시 16세기 말 - 조존성 입향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28년 - 조존성 사망
본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입향지 양주 조씨 입향지 - 충청남도 보령 지역
성씨 시조 조잠(趙岑)
입향 시조 조존성(趙存性)

[정의]

조존성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의 이거 성씨.

[개설]

양주 조씨(楊州 趙氏)는 고려 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추증된 조잠(趙岑)을 시조로 하고 16세기 문인인 조존성(趙存性)[1554~1628]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의 이거 성씨이다.

[연원]

양주 조씨는 양주[경기도 양주시]를 본관으로 하고, 조잠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양주 조씨는 정평공파(靖平公派), 문강공파(文剛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강화공파(江華公派) 총 4개 파로 분파되었다. 이후 조존성이 충청남도 보령으로 입향하였다.

[입향 경위]

양주 조씨가 본격적으로 입향하게 된 경위는 입향조 조존성의 아버지인 조람(趙擥)이 보령 지역의 경주 이씨 이몽규(李夢奎)의 사위가 되면서 보령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면서 조존성은 자신의 외가인 보령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이때 조존성은 자신의 어머니를 외숙부인 이희삼(李希參)에게 부탁하고, 의주로 가서 선조(宣祖)를 모셨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한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광해군 대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면서 조존성은 보령으로 다시 돌아갔다. 약 8년간 보령에서 생활을 하다가 조존성은 다시 조정에 복귀하게 되었지만, 아들과 가족들은 보령에 남아있게 되면서 양주 조씨가 자연스럽게 보령으로 입향하게 된 것이다.

[현황]

2015년 통계지리정보 서비스 본관 인구분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양주 조씨는 11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다락골에 ‘조대비가(趙大妃家)’라고 불리는 집이 남아있으나 훼손 상태가 매우 심하다. 또한 이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한 연원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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