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907
한자 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사현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있는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과 의미를 기리기 위하여 나라의 명을 받아 세운 정려.

[개설]

정려(旌閭)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내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던 풍습을 말한다.

[조선 시대의 정려]

정려(旌閭)·정문(旌門) 풍습은 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해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려 정책은 1392년(태조 1) 7월에 방침을 밝힌 이래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대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忠臣)·효자(孝子)·의부(義夫)·절부(節婦)’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그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알리게 하였다. 대상자들은 행적에 따라 요역(徭役)을 면제하거나,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었다.

정려는 사족(士族)에게는 가문의 명예였으며, 노비의 경우에는 면천(免賤)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실제 생활에 이익을 주었다, 정표자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려(旌閭)·정문(旌門)은 전국적으로 잘 보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보령 지역의 정려 표창 기록]

보령 지역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종실록(世宗實錄)』이다. 1431년(세종 13) 10월 28일의 기사에는 “보령현(保寧縣)의 여자 감물이(甘勿伊)는 나이 39세에 남편이 죽으매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었고, 상복을 벗고 난 후에도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시집 보내려 하였으나 숨어서 따르지 않고 자식을 따라 살았으며, 시아버지가 죽으매 또 삼년상(三年喪)을 지냈고, 시어머니가 죽으매 또 삼년상을 지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실록과 함께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같은 지리지(地理志)에도 충·효·열(忠·孝·烈)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문헌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17건이다.

[보령 지역의 정려 표창 인물]

『보령시지』에 따르면 보령 지역에는 27건의 정려가 남아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보령의 지역별 정려는 남곡동에 1건[효자 고이대(高二大)], 주산면에 7건[열녀 백낙완(白樂完)의 처 평산신씨(平山申氏), 이진영(李震榮)의 처 남포백씨(藍浦白氏), 구사신(具思諶)의 처 개성고씨(開城高氏), 임세헌(任世憲)의 처 한양조씨(漢陽趙氏), 임헌순(任憲順)의 처 평산신씨(平山申氏), 임성순(任聖舜)의 처 보성오씨(寶城吳氏), 효자 임은모(任殷模)], 미산면에 3건[열녀 김준배(金俊培)의 처 인동장씨(仁同張氏), 효자 박승건(朴承健)·박세주(朴世冑), 이호정(李鎬鼎)], 웅천읍에 5건[열녀 이기숭(李基崇)의 처 동복오씨(同福吳氏), 효자 최광필(崔光弼), 김첨희(金瞻喜), 황정직(黃廷直), 황유업(黃有業)], 남포면에 2건[효자 이백귀(李百貴), 이선원(李善元)], 청소면에 2건[효자 오수현(吳壽顯), 김계환(金啟煥)], 주포면에 1건[열녀 최종환(崔鐘環)의 처 밀양박씨(密陽朴氏)], 청라면에 5건[열녀 신지(申𣹡)의 처 진주정씨(晉州鄭氏), 효자 구만원(具萬元), 신석붕(申錫鵬), 서한경(徐漢慶), 신상돈(申相敦)], 오천군에 1건[효자 신응수(申應秀)]이다.

[의의와 평가]

정려는 나라에 헌신한 충신과 삼강의 덕목을 지킨 효자, 열녀를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지역사회에서 널리 모범이 되게 하고자 건립되었다. 보령 지역의 충·효·열 정려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수가 증가하며, 열녀, 효자 정려 외에 현존하는 충신 정려는 없다. 보령 지역의 정려는 보령의 지역사 연구에 기초 자료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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