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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850
한자 粉圃齋
영어공식명칭 BunPoJa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불곶이길 54-14[모산리 708]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대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00년 전후연표보기 - 분포재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85년 - 분포재 뒤편 송림, 죽림 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 - 분포재 뒤편 도로 확장으로 토담 및 송림 훼손
현 소재지 분포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불곶이길 54-14[모산리 708]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부안 김씨 직장공파
관리자 부안 김씨 직장공파 김종선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모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재실이자 동학 농민군의 최초 집결 장소.

[개설]

분포재(粉圃齋)부안 김씨(扶安金氏) 직장공파 김보칠(金甫漆)의 재실(齋室)이며,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혁명 당시 부안 동학 농민군의 최초 집결지였다.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때 문무(文武) 양과에 합격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김보칠의 묘와 재실로, 이를 계기로 김보칠의 자손들이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현판 글씨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썼으며, 후손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이 기(記)를 지었다.

1894년 3월 26일 개최된 백산 대회 이후 4월 1일 부안 동학 농민군이 최초로 분포재에 집결하였으며, 이들은 백산 대회 이후 부안으로 이동한 동학 농민군과 합류하였다. 그때 500여 명이 각자 죽창을 들고 집결하였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쓴 붉은 깃발을 내걸었고, 부안, 고부, 영광, 무장, 흥덕, 고창 등의 읍호를 쓴 작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부안 관아에 편지를 보내 시장(市場)에서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분전 수세(分錢收稅)]하는 것을 금지할 것 등 4개조의 폐단[弊瘼]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부안 관아를 점령하였는데, 이때 동학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華仲)이 함께하였다. 일부는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홍재일기(鴻齋日記)』에 “도소봉[현재 승암산]에 올라 멀리 장갈리를 바라보니, 김여중[낙철]이 수백 명을 모아 분토동 김씨 재실에 둔취(屯聚)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위치]

분포재는 부안군 부안읍 불곶이길 54-14[모산리 708번지]에 위치한다. 마을 뒤에서 분토(粉土)[白土]가 많이 나와 ‘분토동(粉土洞)’이라 하였는데, 분포재는 분토동 동쪽에 있다.

[변천]

1500년(연산군 6) 전후 김보칠의 묘 인근에 재실로 건립되었고, 1685년(숙종 11)에 재실 뒤편을 중심으로 송림과 죽림을 조성하였다. 2004년에 재실 뒤편으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토담과 송림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건물이다. 자연석의 한 면을 다듬어 쌓은 기단부에 원형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빗장은 거북 둔테로 장식하였다.

[현황]

부안 김씨 직장공파가 소유하고 있으며, 부안 김씨 직장공파 김종선이 관리하고 있다. 분포재 좌측에 창고가 있고 우측에는 관리인 숙소 겸 쉼터가 있다.

[의의와 평가]

분포재는 조선 세조 때 인물 김보칠을 모신 재실이며, 또한 동학 농민 혁명 때 부안 지역 동학 농민군이 최초로 집결한 장소이기도 하다. 분포재에서 분전 수세를 금지할 것 등 4개조의 폐단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분토동을 거점으로 부안 관아를 점령하는 등 분토동과 분포재는 부안 동학 농민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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