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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15
한자 太陽-海邊-敍情辛夕汀
영어공식명칭 He lyric emotion of the sea-side poured like the sunlight|The great poet, Seokjeong Sh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용

[정의]

신석정(辛夕汀)은 1907년 부안에서 태어나 1974년에 작고한 한국 현대 시단의 거목이다. 1924년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시문학파(詩文學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일관되게 절조 있는 시 세계를 선보였다. 광복 이후에는 잠시 언론계에 몸담기도 했고 교육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생전에 『촛불』·『슬픈 목가』·『빙하』·『산의 서곡』·『대바람 소리』 등 5권의 시집을 냈고, 2007년에 유족과 제자들에 의해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이 간행되었다.

[암울한 시기,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각성하며 소년은 청년이 되다(1907~1930)]

1907년(고종 44)은 조선에서 이름을 바꾼 대한제국의 말년기로 당시 연호로 광무(光武) 11년에 해당한다. 이태 전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해 국권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로 오백 년을 넘게 이어온 왕조의 운명은 태풍을 맞아 곧 꺼질 촛불과 같았다. 이해 음력 7월 7일. 석정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03-2번지에서 부친 신기온(辛基溫)과 모친 이윤옥(李允玉)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 무렵, 부안의 신씨 가문에서는 대대로 의원이 많이 나왔는데 부친은 4대째 옥성당(玉成堂)이란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본관은 영월(寧越). 본명은 신석정(辛錫正)이었다.

1910년, 결국 경술국치를 맞아 한반도 전역에는 망국의 울분과 함께 비탄, 분노의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일인 동시에 미래 전망을 암울하게 만든다. 많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민족과 조국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이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석정의 부친 신기온도 이와 같은 우국지사의 한 명이었다. 1912년, 삼남 지역의 큰 학자로 추앙받던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는 망국의 슬픔을 견디고 미래를 위해서는 성리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 소임이라고 판단, 부안 계화도(界火島)로 들어오게 된다. 간재는 이 섬의 이름을 ‘중화(中華)의 문명을 잇는다’는 뜻으로 ‘계화도(繼華島)’로 고쳐 불렀다. 간재의 높은 명성과 후학 양성의 뜻에 감명을 받은 당시 청년, 지식인들이 계화도로 몰려들어 간재에게 배움을 청했고, 신기온 역시 이 대열에 동참했다.

신석정은 말년 언론과의 대담 지면[「우리는 죽마고우」, 『전북 매일』, 1972. 4. 26.]을 통해 ‘당시 부친을 만나러 계화도에 갔다가 지독히도 맵고 아픈 매를 맞고 쫓겨났었다’는 내용과 함께 ‘부친은 자식들도 유학자로 키우려고 해서 신문학 작품을 읽고 있으면 빼앗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고 부친에 대한 기억을 술회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엄했던 부친을 대신해 어린 석정을 보살핀 것은 할아버지였다. 석정은 할아버지의 무릎 아래에서 한학적 소양을 쌓기 시작했다. 성리학에 심취한 부친과 달리 할아버지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불학(佛學), 당송(唐宋) 시 등 다방면에 걸쳐 석정을 훈육한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석정이 시인이 된 뒤에도 이어져, 석정은 남송(南宋) 시인 육방옹(陸放翁)을 특히 좋아했던 팔순의 할아버지를 ‘노시인’이라 칭하며 함께 정답게 시 문답을 나눴던 풍경을 「화병과 새와 노시인」이란 산문으로 남기기도 했다. 조손(祖孫)이면서 사제 간이고 또 문학적 도반이기도 했던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석정 문학의 가장 단단한 토대로 자리잡았다.

1917년 석정은 11살의 약간 늦은 나이에 부안공립보통학교[현 부안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한다. 부안공립보통학교 6학년이던 1923년에는 또래 친구들을 모아 ‘움모임’을 조직하여 방정환(方定煥)[1899~1931]이 발간한 소년 잡지를 돌려 읽는 등 문학에 대한 관심을 분명하게 표출하기 시작했고, 동료 학생에 대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취했던 일본인 교사의 처사에 분개하여 동맹 휴업을 주도한 일로 무기정학(無期停學)을 당해 한 해 늦게 졸업하는 일을 겪기도 한다. 석정은 이제 자신의 주장을 뚜렷하게 펼치는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같은 해인 1923년에 만경 출신 박소정(朴小汀)과 혼약[실제 성혼은 1926년]을 맺었으니, 이 무렵 석정은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셈이다.

성장기 석정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연구자들은 남궁현(南宮炫)[1901~1940]과 성해(星海) 이익상(李益相)[1895~1935]을 꼽는다. 석정 또한 「나의 문학적 자서전」이란 글을 통해 두 사람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한 바 있다. 남궁현은 석정 부친의 진외가 쪽 아우뻘 되니 엄밀하게 따지면 석정에게는 숙항(叔行)이었지만 이에 구애받지 않고 형제처럼 부안의 해변을 함께 거닐곤 했다. 남궁현은 영광 법성포 출신으로 전주신흥고등학교 재학 당시 전주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도 신간회(新幹會) 사건, 영광체육단 사건 등으로 일제 치하에서 5차례에 걸쳐 투옥되어 도합 8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한 독립지사였다. 석정은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남궁현을 통해 당시 막 싹트고 있던 새로운 문예 풍조에 대한 소식과 작품을 접하며, 남궁현이 먼저 취득한 시대의 변화와 청년의 역할에 대한 깨달음을 공유하고 그의 열혈 정신에 감화된다.

이익상은 전주 출신의 소설가 겸 언론인으로 일본 유학을 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발기인이기도 했다. 『조선 일보』, 『동아 일보』 학예부장을 거쳤으며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이기도 했으나 1930년대에 들어 돌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每日申報)』로 자리를 옮긴 뒤, 친일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이익상은 일본 유학 전 잠시 부안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바, 석정은 이때 이익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익상은 처가가 부안으로 석정에게는 종매형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이익상은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청년으로 새로운 문물에 목말라 있던 석정에게는 좋은 스승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변절 전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에 몸을 담았을 때는 시골의 청년 문사 석정을 서울 문단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이였다. 그의 변절 또한 석정에게는 지식인의 지조에 관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통해 쌓은 동양적 교양을 바탕으로 남궁현, 이익상 등과의 접촉을 통해 각성하게 된 석정은 이 무렵, 자신의 생활과 조국의 미래 그리고 문학적 구도의 길이 서로 다르지 않고 동궤에 있다는 것을 보다 뚜렷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24년 11월 24일 자 『조선 일보』 지면에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석정은 문단에 그 이름을 알린다. 만 17세의 천재적인 소년 문사가 부안에 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신석정이란 시인이 출현한다는 일종의 예비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석정은 부안에서 습작에 매진하며 1931년 『시문학』 후기 동인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80여 편의 시를 여러 신문 지면을 통해 꾸준히 발표한다. 이 무렵 석정은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타고르, 도연명(陶淵明)을 탐독하면서 한학과 노장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석정은 스스로를 단련하며 자신의 문학적 진로를 지속적으로 모색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그의 필명도 ‘석정(夕汀)’으로 바뀐다. ‘저녁 물가’, ‘해가 지는 해변’으로 풀이할 수 있는 그의 필명은 즉각적으로 낙조가 붉게 타오르는 서해안, 즉 시인의 고향인 부안의 아름다운 해변과 석양을 연상케 만든다. 해변에 앉아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은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시문학파 활동과 청구원에서 광복을 맞기까지(1931~1945)]

1930년 3월, 만 23세의 석정은 돌연 가족을 부안에 놓아둔 채 상경을 한다. 상경 전 정읍 태인 출신으로 불교 혁신 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마명(馬鳴) 정우홍(鄭宇洪)[1897~1949]과 상의했다고 한다. 마명과 석정은 지역 언론 활동, 혹은 지역 문화 활동에 큰 관심을 갖고 의기투합한 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명은 이익상과 마찬가지로 석정의 종매부이기도 하다.

마명의 소개로 당대 고승으로 이름이 높은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 문하에 들어간 석정은 조선중앙불교전문강원에 적을 두고 매일 불학을 탐구하는 시기를 보낸다. 주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읽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약 30여 명의 학승이 모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문학적 관심이 있는 승려들과 함께 『원선(圓線)』이라는 등사본을 만들어 회람하곤 했다고 한다. 승려 시조 시인 조종현(趙宗玄)[1906~1989]과는 이때 만나 교유하기 시작한다.

당시 석정은 이익상의 집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박용철(朴龍喆)[1904~1938], 정지용(鄭芝溶)[1903~1950], 김기림(金起林)[1908~?], 이하윤(異河潤)[1906~1974]과의 교유가 이 무렵에 시작된다. 한용운(韓龍雲)[1879~1944], 이광수(李光洙)[1892~?], 김억(金億)[1896~?], 주요한(朱耀翰)[1900~1979], 최서해(崔曙海)[1901~1932] 등도 이때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부안에서 발아하고 있던 석정의 시심은 이 시절에 본격적으로 개화한 것으로 보인다. 석정은 1931년 8월 잡지 『동광(東光)』에 「임께서 부르시면」, 10월 『시문학』 3호에 후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선물」을 발표한다. 이후 석정은 첫 시집 『촛불』을 엮을 때 「선물」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습작품이라고 하여 싣지 않는다. 「선물」을 발표하던 시점부터, 석정 스스로 자신을 시인으로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동안 갈고 닦은 문학적 역량을 중앙 무대에서 펼쳐 보이며 문단의 신성으로 각광받던 무렵, 석정의 불심과 공부 또한 깊어져 그는 스승인 석전 스님으로부터 출가, 입산을 권유받기도 한다.

고민스러운 상황에서 석정의 최종적인 선택은 귀향, 그리고 문학이었다. 1931년 10월, 석정은 김기림 등 주변 문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약 1년 반의 화려한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부안으로 돌아온다. 석정 스스로는 ‘이때 귀향을 하면서 농사와 문학을 병행하기로 결심하였다’ 후술하기도 했고, 그해 2월 모친의 사망과 고향에서 혼자 생계를 꾸리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귀향 사유로 들기도 했다.

물론, 그 무렵 급변한 시대 정황도 귀향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석정이 서울에 머물고 있던 1931년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통해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동북아시아의 긴장도가 급상승하던 때로, 국내에서는 일제가 그동안 채택했던 기만적인 문화 통치 정책을 철회하고 군국주의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상징적인 두 개의 사건이 일제의 신간회에 대한 탄압과 내부 분열로 인한 해산 결의였고, 카프 1차 검거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석정과 가까웠던 두 사람의 인생 행로를 극명하게 갈라놓는다. 남궁현은 신간회 사건으로 투옥이 되었으나, 카프의 발기인이었던 이익상은 『동아 일보』를 그만두고 『매일 신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변절, 친일의 길에 들어선다. 불경 공부와 문학 공부를 겸하여 서울을 찾았던 석정은 세상 공부도 함께 한 셈이었다.

석정이 귀향을 결심한 1931년은 『동아 일보』에 의해 ‘브나로드(Vnarod) 운동’이 제창되던 때이기도 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를 차용한 브나로드 운동은 청년 지식인들이 농촌에 뛰어들어 그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개조하자는 취지였다. 석정의 귀향 당시 결심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시 창작을 하는 동시에, 땅에 씨를 뿌리거나 후생을 교육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부안으로 내려온 석정은 1932년,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 560번지[현 부안읍 선은리]에 집을 마련하고 옥호(屋號)를 ‘청구원(靑丘園)’으로 정하고 스스로 원정(園丁)을 자처했다. 원정은 1924년에 이 땅에 소개된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 제목이기도 했다. 영향 관계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귀향 직후 석정이 쓴 시다.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혔다면/ 산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멀리 날어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밭을 찾어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밭을 지키는 […하략…]

- 「날개가 돋혔다면」 부분[『삼천리』, 1932. 5. 『촛불』 수록]

우리나라를 일컫는 청구(靑丘)를 옥호로 삼은 것, ‘별밭을 지키는’ 원정이 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은 청구원이란 실제 거주 공간이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시인의 내면 의지가 구체화된 공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청구원은 실재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가 도착해야 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먼 나라’이기도 하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중략…)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고/ 양지밭에 흰염소 한가히 풀뜯고/ 길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삼천리』, 1932. 5. 『촛불』 수록]

‘먼 나라’는 노루 새끼, 야장미, 흰 물새, 흰염소, 옥수수가 사는 나라로, 그곳이 어디 있는지는 어머니에게 물어야 하지만 또한 시인이 이미 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안의 청구원이 그곳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시인의 영토이면서, 원정이 되어 가꾸고 지켜야 마침내 만날 수 있는 잃어버린 영토, 되찾아야 하는 ‘복락원(復樂園)’의 다른 이름이 ‘청구원’이었던 것이다. 실제 청구원이 이상향 ‘청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상략…]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부분[『조선 일보』, 1933. 11. 30. 『촛불』 수록]

밤하늘의 별빛을 보려면 기다려야 하고, 촛불은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땅 위의 인간이 피워 올린 작은 별빛이다.

부안 청구원에 칩거하며 자신의 문학적 영토를 일구는 석정의 모습은 이내 문단의 화제가 된 듯하다. 김기림이 석정을 ‘목가 시인’이라 칭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동료 문학인들에게 청구원은 심방의 장소가 된다. 1933년, 가장 먼저 청구원을 찾아온 이는 부안과 곰소만을 사이에 둔 고창 출신 서정주(徐廷柱)[1915~2000]였다. 당시 고창중학 2학년이었던 서정주는 이때부터 서울에 올라가기 전까지 한동안 석정을 찾아와 문학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했다. 일찍부터 석정의 시를 흠모해 황해도연백에서 편지를 보내오던 장만영(張萬榮)[1914~1975]도 이때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청구원을 찾아왔다. 장만영은 이때 석정으로부터 처제 박영규(朴英圭)를 소개받아 석정의 손아래 동서가 되었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와 영광의 시조 시인 조운(曺雲)[1898~?]이 함께 찾아온 것은 1935년 8월. 세 사람은 변산 해변에서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조국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석정은 가람을 문학의 스승으로 섬기기 시작한다. 또, 석정이 평소 극찬해 마지않던 작품 「석류」를 쓴 조운은 최서해의 손위 처남이기도 했고,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남궁현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문학계 선후배들이 청구원을 찾는 동안 청구원 뜨락에는 은행나무, 벽오동, 매화나무, 시누대, 버드나무가 자리를 잡았고 100여 평[330㎡] 채마밭에는 집안 식구들의 먹거리인 각종 푸성귀와 토마토가 자랐다. 석정은 그야말로 원정이 되어 이 청구원을 가꿔 나갔다. 장녀 일림[1932년생], 차녀 난[1935년생], 3남 광연[1938년생], 3녀 소연[1941년생], 4녀 엽[1943년생], 4남 광만[1948년생]까지 8남매의 자녀 중 6명이 여기 청구원에서 출생했다. 석정의 글 농사도 이 무렵 결실을 맺고 있었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고, 차츰 첫 시집을 묶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39년, 석정의 첫 시집 『촛불』이 인문사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2년 전부터 시집 출간을 준비하며 자신의 나이에 맞춰 33편을 골랐다[이후 ‘대지사’ 판에는 세 편이 추가되어 36편이 수록됨]. 석정은 이때 김기림이 앞장서 준비한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9년 만에 상경을 하고, 여기서 또 많은 문학인들과 인사를 나눈다. 『촛불』의 출간을 통해 석정의 시단 내 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촛불』의 시편에는 타고르와 만해, 그의 동양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해가 지고 별이 반짝이는 부안의 풍광이 녹아들어 있었고 나라를 잃고 슬피 우는 식민지 지식인의 울분이 담겨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빛나는 것은 석정 그 스스로 자신을 시인으로 가꾸고 키우는 마음이었다. 그 간절함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들을 시인의 내부로 끌어 모아 온축(蘊蓄)케 하였고 마침내 언어적 결정(結晶)으로 빚어져 나온 것이었다. 『촛불』석정만의 언어, 석정만의 불꽃으로 피워 올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세계였다.

또한, 『촛불』의 출간은 한국시사에 ‘자연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일제의 침탈과 내부 분열, 변절과 배신으로 오염된 현실 세계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던 땅의 순수함을 지키고 거기서 미래를 가꾸는 일이야말로 견고한 투쟁의 방식이며, 강력한 메시지 발신 방식이라는 것을 석정『촛불』을 통해 몸소 보여줬다. 이는 도연명이나 타고르를 비롯한 동양의 문사들이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현실 저항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는 석정에게 시집의 출간을 자축하고 있게 놓아두지 않았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뒤 한반도는 일본 군대의 교두보와 병참 기지 역할을 맡아야 했고, 군수 물자 징발과 후방 단속을 위해 일제의 탄압은 나날이 더 극악해지고 있었다. 문화계에도 그 충격은 여과 없이 밀려왔다. 1940년에는 『동아 일보』, 『조선 일보』 등이 폐간되었으며, 1941년엔 당대 문학인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문예지 『문장』도 폐간된다. 그리고 석정에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존경했던 선배, 동료들이 친일의 길로 접어든 것이었을 것이다.

석정은 이후, 자신이 젊은 시절 탐독했던 투르게네프와 괴테에 대해 매우 상반된 평가를 하게 된다. 임종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의 고귀한 유산인 러시아어를 지켜 달라’고 했던 투르게네프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자신의 조국을 유린한 나폴레옹에게 헌시를 쓴 괴테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풀레옹을 찬양한 헤겔이나 이탈리아 파시즘에 협력한 에즈라 파운드 역시 석정에겐 질타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변절한 동료들을 향한 분노를 직접 표출하기보다는 이와 같이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일제 말기에 친일의 길에 접어든 이들 중에는 석정과 가까운 이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절망의 깊이도 더했을 것이다. 석정은 평생 석전 스님과 만해, 가람을 스승으로 섬겼고, 조지훈(趙芝薰)[1920~1968] 시인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나눴는데 모두 올곧게 지조를 지킨 이들이었다.

석정은 1939년 학운구락부에 투고한 「방(房)」이란 시가 문제가 되어 일제의 혹독한 문초를 받기도 하고, 1940년 『문장』에 투고한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는 검열 삭제되는 울분을 겪기도 했다. 이후 친일문학지인 『국민 문학』에서 일본어로 시를 투고하라는 원고 청탁서가 날아와 찢어버린 뒤 절필(絕筆)에 들어간다. 절필은 문학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투쟁 방식이었고, 자신에게 엄격해야만 하는 통과할 수 있었던 치열한 인고의 과정이었다. 석정은 이 시기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경찰서 출두의 압박 등을 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그 시절을 보내며 더 깊이 자신의 문학혼을 담금질했다.

[광복의 기쁨은 분단과 전쟁의 슬픔으로 바뀌다(1946~1953)]

슬픈 짐승처럼 청구원에 웅크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을 견뎌내고 있던 석정은 광복의 소식을 듣자마자 매우 기민하게 움직인다. 본인의 술회에 의하면, 1945년 봄부터 일본의 패전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기에 막상 광복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고 했는데, 미리 예견하고 있었기에 이같이 준비된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1945년 8월 18일.

광복을 되찾은 지 사흘 뒤에 열린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석정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부터 석정은 문학계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광복기를 맞아 친일 문학 전재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 문학의 건설이라는 당대의 요구를 수행하는 활동을 지속한다. 1946년 2월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에 홍명희(洪命憙)[1888~?], 이병기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 이후 전북문화인동맹[1946], 전북문화연맹[1947] 등의 출범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

또한, 광복 직후 바로 부안의 지인들과 함께 부안문화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안 거주 일본인들이 퇴각하면서 문화재를 몰래 반출해 가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중학 설립 기성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부안중학교 개교[1946]를 준비한다. 석정은 광복기 부안 문화 운동과 교육 운동의 중추로 등장한 셈이었다. 부안중학교의 국어 교사 생활을 기점으로 석정은 오랜 기간 교단에 몸을 담게 된다.

그리고, 1947년 석정은 부안의 낭주문화사를 통해 100부 한정판으로 그의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를 간행한다. 첫 번째 시집 이후 극악한 일제 말기를 견디며, 민족어와 자신의 시심을 견결(堅決)하게 지키며 쓴 시들이었다.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心臟)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蘭)이와 나는/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전문[『문장』, 1939. 8월호, 『슬픈 목가』 수록]

부안 앞바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부녀의 모습 속에 물아일체의 경지가 보인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던 이들은 이내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 있게 된다. 보는 주체가 보여지는 객체로 전이되는 순간,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이들은 역시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본다. 시인의 손끝에 의해 문자화된 부안 해변의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바다와 나무와 순한 짐승과 부녀는 풍경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이 풍경을 완성하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홍몽(鴻濛)[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아니한 혼돈 상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는 바다 앞에서 이들은 모두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처럼 이 광경 속에 녹아든다.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서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들길에 서서」 전문 [『문장』, 1939. 6월호, 『슬픈 목가』 수록]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이 시는 고향의 흙과 하늘과 함께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에서는 시인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결의가 두드러진다. 자연친화적이지만 시대에 순응하는 것은 아닌 시인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시대가 힘들게 하더라도 ‘푸른 산’과 ‘푸른 별’이 있으면 ‘좋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시인의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체념’이 아닌 ‘견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촛불』을 통해 자신의 시 세계를 공고히 천명한 석정은 두 번째 시집을 통해 드높은 시적 성취를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슬픈 목가』를 통해 한국 시단은 암울한 1930년대 말의 한국시가 도달한 경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슬픈 목가』 초간본 서문에는 김아(金鵝)[본명 김태종]라는 이의 서문이 실린다. 김아는 부안에서 활동하던 전방위 문화인으로 광복 전에도 이미 입산 항일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초간본에 실린 「산에서 온 사나히-김아에게」는 석정이 그를 위해 쓴 시였다[이후 저작권을 대지사에 넘긴 뒤 1952년에 나온 중간본에는 김아의 서문도 삭제되고 시의 제목도 「작은 짐승이 되어-K에게」로 바뀐다]. 이 무렵 석정 시인의 역할과 부안 내 교유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광복 이후 석정은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본연의 집필 활동에도 충실하면서 문학인과 문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이 시기에 쓰여진 석정의 시 「꽃덤풀」은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여실한 표현과 시인의 소망을 동시에 담고 있는 작품이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는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친구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꽃덤풀」 전문[『신문학』, 1946. 6월호, 『빙하』 수록]

광복을 맞이한 기쁨과 지난 시절에 대한 회한, 미래에 대한 기대 등이 모두 담겨 있는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3연이다. ‘그러는 동안에’가 다섯 번이나 반복되면서 잃어버리고, 떠나버리고, 몸과 맘을 팔아버린 벗들의 기억이 지나간다. 1907년 생인 석정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그 시절 속에서 성장하고 좌절하면서 지냈다. 이미 사라진 나라는 아버지의 회한 속에 존재했지만, 부안 고향은 삶의 현장이었다. 석정에게 36년의 시간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에게 감동하고 사람에게 실망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가슴을 쥐어뜯으며’ 나라 잃은 망국민의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이제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의 시간이 오리라, 와야만 하리라, 는 믿음은 석정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온 온 민족의 비원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진행 방향은 민족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광복 3년 뒤,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 또한 단독 정부를 선포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제주 4·3, 여순 사건이 일어났고 다시 입산과 저항을 선택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이렇게 고착화된 분단은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1950년 6월 25일. 결국 현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인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모든 걸 파괴한다. 생명을 빼앗은 자리에 죽음의 핏자국의 흥건하고, 건물과 도로와 같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자산부터 인간에 대한 신뢰, 희망, 문화적 생태계처럼 비가시적인 가치들도 모두 파괴된다. 광복 후 고향 부안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헌신해 왔던 석정의 삶도 이때 크게 상처받는다.

남은 기록에 의하면 석정은 부안군 인민위원회의 위원장 직을 18일 정도 수행하게 된다. 인민군 치하에서 그게 부안과 부안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빚어 놓은 불신과 폭력적인 편 가르기 속에서 석정은 좌익 계열 요시찰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또한, 전란의 와중에 차남 제영이 행방불명되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결국, 1951년 석정은 부안을 쫓기듯 떠나게 된다. 부모와 조상들의 땅이었고, 그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시의 영토였던 부안 땅을 떠난다는 것은 삶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주로 나온 석정은 지인의 집에 기숙하면서, 생활고로 인해 『촛불』과 『슬픈 목가』의 판권을 헐값에 대지사에 넘겼고, 이로 인해 이 두 권의 시집에는 앞서 언급한 내용의 변화가 발생한다. 1952년 가족들까지 모두 전주로 나왔고 이 시기 석정은 태백신문사 편집 고문이란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아끼던 책들을 중고상에 팔아넘겨야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광복 이후, 새로운 시대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하며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던 석정은 중년의 나이에 터진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기반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광복의 기쁨은 순식간에 분단과 전쟁의 고통과 슬픔으로 바뀌었다.

[상처받은 모든 이들을 위한 산울음같은 포효(1954~작고)]

1954년. 석정은 광복 후 부안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이력이 도움이 되어 전주고등학교 교단에 서게 된다. 이후 7년간 석정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후에도 석정은 김제고등학교[1961~1964]를 거쳐 전주상고[1964~1972]에서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교단을 지킨다. 가람 이병기의 주선으로 전북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젊은 학생들과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 미지의 가능성과 마주하는 일. 석정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차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게 된다. 전주고등학교 재직 시에는 재학생들의 문학 동아리인 맥랑시대(麥浪時代)를 지도하였는데 오하근, 오홍근, 강일부, 강인한 등의 제자들이 당시 지도를 받았다. 전북대학교에 출강하면서 알게 된 젊은 문학도들인 황길현, 채만묵, 김종곤, 장태윤, 서완석, 이귀호, 허소라 등과도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작 활동은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1956년 세 번째 시집 『빙하』를 정음사에 출간하면서 석정은 광복 후부터 전쟁과 전후 혼란기에 겪고 느낀 소회들을 시적 언어로 정제한다. 4·3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제주도의 풍경, 이름도 없이 고혼으로 지리산 산록에 스러진 영혼들에게 바치듯이 쓰여진 『빙하』의 시편들에는 석정의 매서운 결기와 눈물 어린 시선이 함께 드러난다. 광복을 맞이한 줄 알았지만, 오히려 전란의 잿더미에 나앉게 된 현대사의 쓰라린 상처들이 모두 석정에게는 통곡의 대상이었고, 또한 위무의 대상이었다.

6·25 전쟁 이후 궁핍과 혼란은 계속되는데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 세상에 대한 원망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도 석정은 시인의 언어를 견결하게 지켜나간다. 1956년 쓰여진 「대춘부(待春賦)」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을 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춘부」 전문[『삼남 일보』, 1956. 1. 1, 『빙하』 수록]

이외에도 석정은 『대역 중국시집』[1954], 『대역 매창시집』[1958]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가람과 함께 『명시조 감상』[1958] 등을 펴냈으며 『자유문학』지 추천 위원으로 활동하며 황길현·이병훈·이기반·허소라·김민성 등의 젊은 시인을 발굴해 낸다.

1960년 4월 혁명을 맞이했을 때, 석정은 누구보다 크게 감격한다. 『전북대 신문』[당시 『전북대학교보』] 4월 13일자에 「4월 혁명에 부치는 노래」를 발표했고, 역시 같은 지면 6월 15일자에는 「우리 형제들을 잊지 말아라」는 시를 발표한다. 또한 같은 해 『서울 일일 신문』에 「단식의 노래-싸우는 교육 동지에게」를 발표하며 전국교원노조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때, 석정이 터뜨린 사자후는 당대의 역사적 사건 현장의 절박함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의의가 있다. 이때 석정의 시편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 독재 시대에 억압받았던 민중들의 절실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문학사 속에서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석정은 더욱 요시찰 인물이 된다. 5·16이 터지면서 석정은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풀려난다. 전국교원노조 관계자 1,500명이 체포되던 시기였다.

석정에게는 다시 엄혹한 시련의 시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시련이 석정의 굳건한 시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서슬 퍼런 철권 통치가 자행되는 1962년, 석정은 「무영에의 항변」, 「영구차의 역사」 등을 통해 5·16 쿠데타 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1967년에는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꿈의 일부」를 발표하는 등, 탄압이 거세질수록 노시인의 기개를 더욱 늠연하게 드러냈다.

눈물이 피잉 돌았다/ 햇빛이 너무도 눈부신 5월 어느날 남산을 내려오던 내 시야에는/ 그 숱한 고층건물들도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벌판만 같아 보였다./ 내 항상 사랑하던 한강 물줄기도, 백운대 산자락도 보이질 않았다.// 다만/ 그 짙푸른 나뭇잎새와 나뭇잎새마다 부서지는 햇빛이/ 내 흐린 눈망울을 스쳐가고/ 그 햇빛 속에서 셈없이 울어예는 휘파람새 소리가/ 흡사 꿈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꼬옥 한라산 어느 내리막 기슭인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남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끝내/ 피잉 돌던 눈물은 사뭇 철철철 가슴벽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오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문득 나는/ 지금쯤 고향에서 태산목꽃을 무심코 바라보던 아내의 눈에서도/ 어쩌면 눈물이 피잉 돌았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러울 것도 기쁠 것도 없는 나날의 무사를 축원하는/ 아내의 서투른 염불이 시작되었을 무렵,/ 우리들은 명동 어느 다방에서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1969년 5월 어느날, 오후의 일이었다.

-「서울, 1969년 5월 어느 날」 전문[『월간 문학』, 1969. 8월호, 『대바람 소리』 수록]

악명 높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문초를 받고 나오던 날의 풍경과 심경을 담은 이 시에는 석정의 일평생이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서울 풍경 대신 태산목을 마주하고 있을 아내의 눈길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응시하는 시인의 모습에서는 시대의 큰 스승, 참다운 시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석정은 1967년 회갑 기념으로 제4 시집 『산의 서곡』[가림출판사], 1970년 제5시집 『대바람 소리』[한국시인협회]를 간행하였으며, 한국 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산의 서곡』에는 위중한 상태로 병상에 있던 조지훈 시인이 서문을 얹기도 했다.

1973년 연말, 석정은 전북 문화상 심사 도중 고혈압으로 졸도한 뒤 200여 일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등졌고, 임실군 관촌면에 묻혔던 유구는 1991년 부안으로 이장되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석정과 민족사가 함께 걸어온 발자취

석정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976년, 작품 「네 눈망울에서는」을 새긴 시비가 전주 덕진 공원에 들어섰다.

[상략]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네 눈망울에서는」 일부[『산의 서곡』 수록]

시비를 찬찬히 읽는 탐방객들에게 시인은 죽어서도 ‘만나야 할 뜨거운 손’이 보이느냐고 묻고 있는 것. 석정 사후 청록파의 일원이었던 박두진(朴斗鎭)[1916~1998] 시인은 “석정 그가 겪어온 시의 역정은 30년대 이후 우리 민족사, 시사가 겪어온 피나는 발자취이다”라는 조사를 남겼지만, 석정의 발자취는 1974년에 멈추지 않았다. 1991년에는 부안군에 석정 공원이 조성되어 다수의 시 작품이 암각되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고, 2011년에는 청구원 맞은 편에 석정 문학관이 세워져 석정의 인생과 문학적 생애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1984년 석정의 문하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석정문학회는 석정 시인에 대한 추모와 연구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데 각종 시비 건립 사업은 물론 30주기 추모 문학제,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 등을 열었고 유고 시집과 『신석정 전집』 간행 등도 주관했으며, 『석정 문학』이란 기관지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광복 이후 다수의 시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으며, 시 「등고(登高)」는 일본 중학 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2014년 제정된 신석정 문학상을 통해 도종환, 복효근, 허소라 시인 등이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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