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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472
한자 宗敎人
영어의미역 Religionist
분야 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영훈

[정의]

부천 지역에서 종교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나 국가를 위해서 활동한 사람.

[개설]

부천은 일제강점기의 수탈 지역이면서 1960년대 이후 근대화의 현장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부천의 사람들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과 민족주의적인 사고에 일찍 눈을 떴으며, 아울러 근대 시민 민주주의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소외되고 짓밟힌 민중의 울분과 한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장말도당굿’은 부천 근·현대사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매년 중동에서 재현되는 장말도당굿을 통해 부천시민은 부천 근·현대사의 체취를 느끼면서, 동질성과 집단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시민 운동 과정에서도 부천시는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해야 할 종교인들이 부천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실도 부천 현대사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시민 주체적 역량을 바탕으로 서울과 인천의 주변 도시라는 지정학적 제약성을 뛰어 넘어 근대 시민 운동의 중심 도시 및 국제 문화 예술 도시로서의 새로운 부천상을 창출하였다.

[인물]

1. 고미애[1965~1992, 약사·기독교 신자]

고미애는 1965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88년 숙명여자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하였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 가입하여 부천 지역 보건분과장으로 있으면서 올바른 의료 전달 체계의 수립과 국민 건강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부천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과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상담실장 등을 맡아 활동하여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또 새롬공부방 자원 교사로도 활동하며 불우 청소년의 학습 진작과 정서 함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2년 불법 체류자였던 필리핀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2. 신성우[1883~1978, 신부]

신성우는 1960년 부천시 심곡동 489번지에 지금의 소사성당을 신축하였는데, 6·25전쟁 이후에 지은 원래의 성당은 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성가병원 자리에 있었다. 신성우 신부는 그 대지를 성가수녀회에 인계하고 심곡동에 새로 성당을 건축하였다. 1978년 10월 5일 별세하여, 신천리 소재 소사본당 교회 묘지에 묻혔다. 1993년 9월 소명여자중·고등학교신성우의 흉상이 세워졌다.

‘소사의 링컨’이라고 불렸던 신성우는 능동적이고 의지력이 강한 사제였다. 사람들은 신성우가 훌륭한 천품을 지녔으며, 소탈하고 과묵하면서도 자상하고 검소하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58년 동안의 사제 생활 중에 29년을 부천군 소사읍에서 지냈다. 신학교에 다닐 때의 생활을 기록한 유고가 『가톨릭대학보』 10호(1978. 11. 15)와 11호(1979. 1. 26)에 실려 있다. 소사성당에 있는 ‘성가정’상은 신성우 신부의 뜻을 기리는 취지에서 세운 것이다.

3. 이성근[1878~1960, 한의사]

이성근은 1878년(고종 15)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정선이다. 1922년 의사 면허증을 취득하여 그 해 5월 부천군 오정면 원종리에서 개업한 이래 내내 부천에 거주하였다. 이성근이 만든 ‘광제고’라는 고약이 효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성근은 빈부를 막론하고 무료 진료를 펼쳐 1929년 오정면 주민들에 의해 이성근의 공덕을 기리는 ‘의생 이성근 자선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1936년 8월 5일 『동아일보』는 당시 부천군의 의료 시설을 보도하면서 이성근을 “살아서도 가난이고 죽어서도 어렵다는 천편일률로 받는 사망진단서를 받지 않고, 신농씨(神農氏) 도효(桃梟)에 더러워진 것을 가하지 않는 박애의 의생 이성근”이라고 칭송하였다. 또 1929년에 소사공립보통학교[현 부천북초등학교] 학무위원, 1934년에 오정공립보통학교[현 오정초등학교] 학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육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부천시 심곡2동 399-3번지[신흥로40번길 52]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다가 1960년 4월 별세하였다. 부천시 송내2동 정명고등학교 뒷산에 산소가 있다.

4. 임병덕[1920~1999, 교육자·목사]

임병덕은 1920년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에서 출생하여 1946년 평양신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월남하였다. 부천군 소사읍 소재 중앙교회 전도사를 시작으로 장봉교회와 부천할렐루야교회를 신축하는 등 부천 지역 기독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종교 활동과 함께 사회 구호 사업에 진력하여, 1952년 고아원인 소사성육원을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성광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사회복지법인인 백십자사를 설립하였고, 1975년에는 소사성육원을 정신 박약아 특수 시설인 부천혜림원으로 확대·발전시켰다. 1985년에는 장봉혜림재활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에는 혜림어린이집을 개원하는 등 일생을 불우 아동과 장애인의 보호·재활 사업에 헌신하였다. 1986년에 적십자 박애상 은상을, 1995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각각 받았다.

5. 정지용[1902~1950, 시인·가톨릭 신자]

정지용이 가족과 함께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 90-5번지로 이주한 때는 1943년 늦가을이었다. 이주 후에도 부천에서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까지 출·퇴근하였다. 소사공소에 신부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신자들과 성당 개설을 의논하였다. 정지용의 끈질긴 인내와 임세빈 신부의 헌신적인 고행 그리고 신자들의 단결된 마음이 현재 부천에 17개의 성당이 탄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지용은 부천 가톨릭의 기틀 마련에 헌신하였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과 경향신문사 주간이 되었고, 을유문화사에서 『지용시선』을 간행하였다. 1948년에는 박문출판사에서 『지용문학독본』을, 1949년에는 동지사에서 『산문』을 각각 간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끌려간 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6. 조한춘[1919~1995, 무속인]

조한춘은 1919년 김포군 양촌면 대포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한양이다. 아버지의 외가는 부천시 송내동 산골에 대대로 살아 온 평산신씨였다. 외가와 처가가 전문적으로 굿을 하는 집안이었다. 조한춘의 굿은 ‘장말도당굿’이라 하여, 그 원형이 제대로 보존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한춘송내동에 있는 진외가에 드나들며 장말도당굿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조한춘은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조한춘부천시 원미동 182-12번지[원미로 87-3]에 장말도당굿보존회관을 마련하여, 매주 두세 차례 강습을 실시하고 전수자를 양성하였다. 조한춘은 1995년 늦가을 세상을 떠났지만,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장말도당굿이 열려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조한춘은 장말도당굿을 통해 주민들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현대인의 사회적 불안이나 갈등을 해소시키고,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일깨워 주고자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 부천시평생학습센터 부천시사 E-Book(http://learning.bu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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