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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558
한자 扶餘 黃一晧 神道碑 - 黃璡 孝子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5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670년연표보기 -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797년 -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새로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27년 -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이전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1월 3일연표보기 -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51호 지정
현 소재지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57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누각
관련 인물 황일호|황진
크기(높이,길이,둘레) 부여 황일호 신도비 229㎝[높이]|69㎝[너비]|50㎝[두께]
소유자 창원 황씨 종중
관리자 창원 황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51호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황일호의 신도비와 아들 황진의 효자각.

[개설]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扶餘 黃一晧 神道碑 및 黃璡 孝子閣)황일호(黃一皓)[1588~1641]의 신도비와 황진(黃璡)의 효자각을 아울러 지칭한다. 황일호는 1638년(인조 16)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나라를 돕고, 청나라를 치고자 최효일(崔孝一)[?~1644] 등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641년(인조 19)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황일호 신도비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신도비명을 지었고, 현손 황운조가 글씨를 썼다. 송시열은 신도비명에서 병사들과 인고를 함께하며 적을 무찔렀던 용맹한 황일호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황진은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를 정성으로 섬겨 효행을 높이 평가받아 순조 대 효자각이 건립되었다.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은 2001년 1월 3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51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황일호 신도비는 1670년(현종 11) 건립되었으나 1797년(정조 21)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렬의 시호를 받았던 사실과 황일호의 아버지 황신(黃愼), 아들 황진 등 자손들의 공적까지 포함하여 새로 건립되었다. 황진 효자각은 1816년(순조 16) 8월 26일 아들 황진의 효행에 대하여 알리고 정문을 세워 달라는 요청에 따라 1819년(순조 19) 건립되었고, 1927년 4월 황일호 신도비와 함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로 이건되었다.

[위치]

부여 황일호 신도비 및 황진 효자각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57번지에 있다. 논 가운데 황일호 신도비가 있으며, 옆에 황진 효자각이 서 있다.

[형태]

황일호 신도비는 높이 229㎝, 너비 69㎝, 두께 50㎝이다. 두께가 두꺼우며 사각기둥과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다. 황진 효자각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구성된 아담한 맞배집이다. 사각형의 주춧돌 위에 팔각형의 돌기둥을 놓고 기둥을 올렸다. 사면에는 모두 홍살이 꽂혀 있다.

[현황]

황진 효자각 내부에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에는 ‘효자행장사랑 창릉참봉 증통선랑사헌부지평황진지려(孝子行將仕郎 昌陵參奉 贈通善郞司憲府持平黃璡之閭)’라고 적혀 있다.

[의의와 평가]

황일호 신도비에는 황일호의 전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생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황진 효자각은 1인 정려의 작은 정려각으로, 조선 후기 일반적 정려 건축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부여 지역의 충신과 효자의 정려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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