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534
한자 扶餘 雙北里 窯址
영어공식명칭 Kiln Site in Ssangbug-ri, Buye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성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7세기 - 부여 쌍북리 요지 조성 추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41년 - 부여 쌍북리 요지 일본인이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부여 쌍북리 요지 사적 제99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5년 5월 13일~2015년 5월 26일 - 부여 쌍북리 요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서 재발굴 조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쌍북리 요지 사적으로 변경 지정
소재지 부여 쌍북리 요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지도보기
성격 가마터
지정 면적 912㎡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 시대에 기와를 굽던 가마터.

[개설]

부여 쌍북리 요지는 1941년 ‘부여 신궁’ 진입 도로 개설 공사 과정에서 백제 사비 시기의 가마가 발견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일본인에 의하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보고서 등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구조 등은 알 수 없지만, 1기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2015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재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1기의 가마 외에 2기의 가마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과 가마의 구조로 볼 때 가마의 조업이나 조성은 대체로 7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9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위치]

부여 쌍북리 요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일원, 금성산의 북쪽 사면부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41년 송동영에 의하여 지표 아래 약 190㎝ 지점에서 연도 하부가 발견되어 일본인에 의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가 실시되면서 계단식 구조를 가진 등요를 보고하였고, 보존 시설 계획도에 따라 가마 내부에 보강 석축을 설치하고 절개된 측면에는 시멘트를 이용하여 보존·정비 시설을 설치하였다.

이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서 2015년 5월 13일부터 2015년 5월 26일까지 부여 쌍북리 요지의 정확한 위치 및 범위,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재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재발굴조사 결과, 백제 사비 시기의 요지 3기와 수혈 유구, 통일 신라 시대 화장묘 1기가 확인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1호 및 새로 조사된 2호는 지하식 등요이며, 3호는 소성부만 조성되고 조성이 중지되었다. 출토된 기와는 모두 평기와이며, 전돌은 조각 1점이 수습되었다.

부여 쌍북리 요지는 출토되는 유물과 유구의 구조를 통해 볼 때 7세기 전반에 조업이나 조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마는 기와 전용 가마로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제작된 기와의 공급처는 알 수 없다. 다만 출토되는 기와 중 다수를 차지하는 태선문 평기와가 대전 월평동 기와 가마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부여 쌍북리 요지사비 도성 내에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여 볼 수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가마 유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사용되지 않은 가마가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부여 쌍북리 요지에서 확인되는 태선문 평기와가 대전 월평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등 중앙의 기와 제작 기법이 지방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기와를 제작하였던 공인들의 관계, 교류, 중앙과 지방과의 기와 제작 관계 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학술적으로 중요성이 부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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