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749
한자 扶餘隆
이칭/별칭 융(隆)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615년연표보기 - 부여융 출생
활동 시기/일시 644년 - 부여융 태자로 책봉
활동 시기/일시 660년 9월 - 부여융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감
활동 시기/일시 664년 - 부여융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로 돌아옴
활동 시기/일시 665년 - 부여융 당나라로 돌아감
활동 시기/일시 676년 - 부여융 웅진도독부의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임명되어 요동 지역 백제 유민 통솔
몰년 시기/일시 682년연표보기 - 부여융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북쪽 망산에서 부여융의 묘지(墓誌) 출토
성격 왕족
성별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왕족.

[가계]

부여융(扶餘隆)[615~682]의 이름과 자는 모두 ‘융(隆)’이다. 할아버지는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이고, 아버지는 백제 제31대 의자왕(義慈王)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에 644년(의자왕 4)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660년(의자왕 20)에는 “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어, 백제 태자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 이에 만 태자였다는 견해, 만 태자였다는 견해, 가 첫 번째 태자였는데 나중에 왕비 은고(恩古)의 아들 으로 교체되었다는 견해, 이 먼저 태자이고 은고의 아들 로 교체되었다는 견해, 가 모두 태자였다는 견해, 의자왕이 질병을 앓으면서 의자왕 4년경 태자 에게 국정 운영을 맡겼다가 대외 관계에서 수세에 몰리자 의자왕 15년경 가 정권을 잡고 국정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기록의 혼란이 생겼다는 견해 등이 있다.

이 밖의 기록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 『구당서(舊唐書)』 권199 백제전과 권109 흑치상지전 및 권83 소정방전,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 및 권11 소정방전,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기(齊明紀) 6년 7월 조에 인용된 고려사문(高麗沙門)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국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사적]에서 발견된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등에는 태자 융(隆)으로 적혀 있다.

[활동 사항]

부여융은 615년경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나, 64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피하자 사비성에서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가 멸망한 뒤 660년 9월 부여융은 당나라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당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에 따라 664년 현재의 부여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되어 백제 땅으로 돌아왔다.

부여융은 백제의 유민들을 회유하면서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기도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고종(高宗) 인덕(麟德) 원년인 664년 겨울 10월 조에는 “부여융을 웅진도위(熊津都尉)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며, 각주를 달아 “실록에는 웅진도독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유인궤가 검교웅진도독(檢校熊津都督)이었으니 어떻게 또 을 임명할 수 있겠는가? 다음 해 실록에는 웅진도위 부여융이 김법민과 맹세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따른다”라고 설명하였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는 옛 백제 땅에 대한 통치 조직을 1도독부 7주(州) 57현(縣)으로 편제하였는데 웅진도독 직속의 현은 13개였다. 당이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은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당나라와 신라가 대립하고 신라의 압력이 거세지자 부여융은 웅진도독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665년 당나라로 돌아갔다.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한 뒤, 당나라가 676년 요동 지역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긴 웅진도독부의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임명되어 백제 유민을 통솔하였다.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명에는 682년 12월 24일 북망(北邙) 청선리(淸善里)에 장사 지냈다고 새겨져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당기(唐紀)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660년] 8월 조에는 “의 아들 문사(文思)”라는 기록이 있고, 2004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부평현(富平縣)의 무덤에서 출토된 부여태비(扶餘太妃)의 묘지(墓誌)에는 의자왕-부여융-부여덕장(扶餘德璋)-태비로 이어지는 가계가 적혀 있다. 이에 부여융에게 문사(文思), 문선(文宣), 덕장(德璋) 등의 아들이 있었다고 추론한 견해도 있다. 『구당서』 권199 「백제전」에는 686년경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이 대방군왕(帶方郡王) 작호를 이어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묘소]

191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북쪽 망산(邙山)에 있는 무덤에서 부여융의 묘지(墓誌)가 출토되었다. 이후 개석(蓋石)은 낙양박물관, 지석(誌石)은 정주시(鄭州市)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에 소장되었다. 개석과 지석의 크기는 가로 57㎝, 세로 56㎝ 정도의 방형이며, 27행 27열의 구획 안에 670자를 새겨 넣었다. 내용은 선조와 가계, 성품과 활동, 죽음과 장례, 명문 순으로 서술하였으며, 682년 12월에 작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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