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468
한자 落花巖 傳說
영어공식명칭 The Legend of Nakhwa Rock
이칭/별칭 「타사암」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281년 - 「낙화암 전설」 『삼국유사』에 수록
관련 지명 낙화암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의자왕|궁녀
모티프 유형 백제 여인들의 저항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낙화암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낙화암 전설」은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義慈王)과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함께 투신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281년 일연(一然)[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장소와 채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내용]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이후 부여 지역에서는 의자왕과 여러 궁녀들이 백마강낙화암에서 함께 투신하였다는 「낙화암 전설」이 생성되어 전하여 내려왔다.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백제고기(百濟古記)』에도 ‘낙화암’ 대신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과 함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고기』는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유사』에서 인용하여 기록된 내용이 전한다. 「낙화암 전설」의 초기 전승에 해당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의자왕이 궁녀들과 투신한 곳은 타사암이라 불리는 백마강 변 큰 바위였다고 한다. 이야기에 담겨 있는 의자왕과 궁녀들의 구도 설정은 의자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백제의 패망을 자초한 의자왕의 이미지를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로 이용된 것이다. 「낙화암 전설」에서는 백제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의자왕과 궁녀들이 함께 투신하여 속죄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낙화암 전설」은 문학적인 수식을 가미하여 재구성된다. 고려 후기인 1287년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낙화암’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의자왕의 존재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주인공에 해당하는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이다.

이후 백제 왕도였던 부여의 역사성과 부소산(扶蘇山) 주변 백마강의 빼어난 경치를 소재로 한 회고시가 시인 묵객들에 의하여 주목받는 시제(詩題)로 등장한다. 조선 전기인 1484년 김흔(金訢)[1448~1492]은 낙화암을 소재로 한 시에서 ‘삼천궁녀(三千宮女)’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다. 망국의 슬픔을 안고 강물에 스스로 투신한 궁녀들이 3,000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의자왕의 행적이 후궁에 빠져 정사를 그르친 당(唐)의 현종(玄宗)과 유사한 점에 빗대어 ‘삼천궁녀’라고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이다. 「낙화암 전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부인들까지 투신하는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일제의 동화 정책에 의하여 또 한 차례 왜곡상이 재생산되는 변이를 겪은 것이다.

「낙화암 전설」의 원래 발생지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의 옵배였는데, 부소산 낙화암의 뛰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현재의 낙화암으로 위치가 바뀌었다는 학설도 있다.

[모티프 분석]

「낙화암 전설」은 백제의 멸망으로 인하여 사비성의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투신한 내용을 기본 소재로 구성한 이야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백제 여인들의 저항을 담은 이야기이다. 의자왕과 관련된 전설 중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하여 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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