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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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挾仙亭記 |
영어공식명칭 | Hyeopseonjeongg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혁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47년 - 이현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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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03년 - 이현석 사망 |
배경 지역 | 협선정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 |
성격 | 기문(記文)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인 이현석이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의 협선정을 소재로 하여 쓴 기문.
[개설]
「협선정기」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정연리의 협선정(挾仙亭)을 소재로 하여 조선 후기의 문인 이현석(李玄錫)[1647~1703]이 지은 기문(記文)이다. 이현석은 1667년(현종 8)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76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된 뒤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 우승지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1607~1689] 등 서인의 예론(禮論)을 반대하다가 철원에 부처(付處)[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되었다. 1693년 춘천부사를 지냈다.
1692년에 이현석은 종제(從弟) 이현조(李玄祚)[1654~1710]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이때 이현석이 정자연(亭子淵)과 협선정을 유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월담(月潭) 황근중(黃謹中)[1560~1633]의 증손(曾孫)인 황양성(黃陽城) 사군(使君)이 기문을 청해서 「협선정기(挾仙亭記)」를 지었다. 「협선정기」는 고종 연간에 펴낸 『유재집(游齋集)』에 수록되었다.
[구성]
기(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서 자신의 의견 개진과 감정 묘사 및 산천 경관의 묘사 등을 겸하기도 하는 한문 문체인데, 이현석이 지은 「협선정기」도 기(記)에 속한다.
[내용]
“나는 일 때문에 철원을 갔다가 정자연(亭子淵)을 지났다. 정자연은 세상에서 소금강(小金剛)이라 칭한다. 산수(山水)가 매우 깨끗하여 바라보니 시력이 단번에 밝아지고 10리에 걸쳐 푸른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어 처음에는 동학(洞壑)이 있는 줄 모르지만 시내를 따라 점차 들어가면 나무 그늘을 뚫고 가니 하늘은 시원하게 높고도 깨끗하다. 양쪽 언덕의 기이한 바위는 천 척이나 우뚝 서서 좌우로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소나무 숲이 처음과 끝이 되고 푸른 물은 아래로 흐른다. 도는 물은 맑은 못이 되고 물가는 급히 흐르는 여울이 된다. 쟁쟁 물소리 맑으니 정신을 상쾌하게 하여서 차갑게 한다. 조그만 배를 불러 물 가운데로 가서 쳐다보니 몇 칸 초가집이 아득한 노을 사이에서 은은히 비친다. 아득하여 신선의 거처인 것 같아 물어보니 협선정(挾仙亭)이라 한다. 올라가서 보니 긴 숲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인사하는 것 같고 줄진 바위는 병풍과 같다. 천석(泉石)은 궤안(几案) 같고, 언덕과 산은 안주와 과일 같아 구름과 안개가 변하여 진실로 응대하여 맞이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산수의 뛰어난 색을 돌아보는 가운데 모을 수 있다.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고 차가운 바람이 겨드랑이 간지럽히니 훌쩍 날개를 달고 구름 위로 솟는 것 같다. 소동파가 말한 하늘 나는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는 것이 허탄한 말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거처를 정한 자가 누구냐 물으니 예전의 관찰사 월탄(月灘) 황공(黃公)으로, 만년에 살던 곳이다. 정자 또한 월탄공(月灘公)이 지은 것인데 가장 위치가 높아 경치가 좋은 곳을 고른 것이다. 공이 죽고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정자가 폐허가 된 것이 50년이 되었고, 지금 새로 지은 것은 공의 증손인 양성 사군이라고 한다. 사군이 불러서 잠시 쉬자니 물고기를 그물질하여 안주를 내어 한참 담소를 하고, 창가에 기대어 의기 양양해하다 돌아왔다. 이로부터 나는 꿈에도 정자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이하 생략) (日. 余以事道鐵原. 過所謂亭子淵者. 亭子淵. 卽世所稱小金剛也. 山水淸絶甚. 望之眼力頓明. 而十里長松蒼翠環擁. 始亦不知有洞壑也. 沿溪漸入. 穿歷樹陰而已. 颯爾沈寥天矣. 兩岸奇巖. 壁立千尺. 峛迤左右. 竟松林爲首尾. 而碧流轉其下. 匯者爲澄潭. 磯者爲激湍. 鏘鳴泂澈. 使人神爽而洌如也. 呼小艇以涉中流而仰視之. 則茅齋數椽. 隱映於縹渺霞嵐間. 杳然疑仙居者. 詢之. 乃挾仙亭云. 旣登而臨之. 長林如拱揖然. 列巖如屛障然. 泉石焉几案也. 岡巒焉飣餖也. 雲煙之變態. 固應接不暇乎. 而溪山秀色. 可攬結於顧眄中矣. 灝氣透骨. 泠風駕腋. 飄飄若羽化而凌雲. 蘇仙所云挾飛仙以遨遊者. 始覺其非誕語也. 問卜居者誰歟. 則蓋故觀察使月灘黃公晚節棲息之所. 亭亦月灘公所置而占其最爽塏者. 公歿而且兵燹矣. 亭之廢垂五十年. 今而新之者. 乃公嗣曾孫陽城使君云. 使君要我少憩. 網溪鮮以佐酒. 相與半▦話. 寄傲軒窓而歸. 自是而余之夢魂. 未嘗不在亭子淵矣.)”
[특징]
「협선정기」는 정자연 위 절벽에 위치한 협선정에 대한 기문이다. 주변의 묘사가 세밀하여 마치 협선정에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는 듯하다.
[의의와 평가]
정자연 위 절벽에 월담 황근중이 지은 정자는 창랑정(滄浪亭)이었다. 경치가 빼어나 찾아드는 시인 묵객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때 청나라군에 의하여 전소되고 이어 월담의 후손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이현석이 1692년에 들렀을 때 정자의 이름은 협선정이었다. 정자를 중수하면서 이름이 바뀐 과정을 보여 준다. 이후 조선 후기의 문신 오재순(吳載純)[1727~1792]이 1758년에 「정연기(亭淵記)」를 지을 때 정자의 이름은 선유정(仙游亭)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