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273 |
---|---|
한자 | 弓王古都有感 |
영어공식명칭 | Gungwanggodoyuga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혁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357년 - 강회백 출생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402년 - 강회백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478년 - 「궁왕고도유감」 『동문선』에 수록 |
배경 지역 | 풍천원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
성격 | 한시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강회백이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에 있던 궁예의 옛 도읍지를 보며 지은 한시.
[개설]
「궁왕고도유감」은 조선 전기의 문신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의 풍천원(楓川原) 일대에 있던 궁예(弓裔)[?~918]의 옛 도읍지를 보며 지은 한시이다.
강회백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으며, 밀직사(密直司)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昌王)[1380~1389]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1354~1394]와 함께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 이조판서에 있을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 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구성]
「궁왕고도유감」은 칠언율시(七言律詩)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1478]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고성무몰대소림(孤城蕪沒帶疏林)[황폐된 외로운 성이 성긴 숲 가운데]
단갈소잔세월심(斷碣燒殘歲月深)[꺾어진 비석도 불에 탄 지 세월이 오래구나]
고각성고풍부지(鼓角聲高風不止)[고각 소리 높은데 바람이 휘몰아치고]
정기영동일장침(旌旗影動日將沈)[해도 넘어가려는데 깃발만 펄럭펄럭]
산사고국천년한(山舍故國千年恨)[산은 고국의 천년 한을 머금었고]
운포장공만리심(雲抱長空萬里心)[구름은 장공 만 리의 마음을 가졌구나]
자고흥망개유치(自古興亡皆有致)[예로부터 흥망이 다 까닭 있나니]
원인전철계래금(願因前轍戒來今)[전철을 보고 장래를 경계하고저]
[특징]
「궁왕고도유감」이라는 제목 옆에 “제군(諸軍) 도총병(都摠兵)으로 공(公)이 거기 주둔하였다.”라는 주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강회백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로 나갔을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궁왕고도(弓王故都)’는 강원도 철원 북쪽 27리[약 10㎞]의 풍천원에 있던 궁예의 옛 도읍지를 말한다. 『강원도지』는 풍천원에 대하여 “궁예가 도읍한 곳으로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외성은 둘레가 14,421척[약 4.4㎞]이고 내성은 둘레가 1,905척[약 0.6㎞]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는데 지금은 이미 무너져 내렸으나 궁전의 남은 터가 아직도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강회백은 옛 도읍지를 보고 나라의 흥망을 떠올렸는데, 폐허가 된 궁예의 도읍지가 역사적 교훈을 주는 기능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