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17
한자 百年之大計鐵原初等學校
영어공식명칭 Plan which spans a hundred years, Cheorwon Elementary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인옥

[정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있는 120년 전통을 지닌 공립초등학교.

[개설]

1899년 철원읍 사요리에서 철원공립소학교로 개교한 철원초등학교는 1906년 철원공립보통학교, 1938년 철원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철원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광복 후 철원국민학교로, 1996년 3월 철원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20여 년 동안 철원초등학교는 명실공히 근대 학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며 조국 근대화와 강원 교육의 초석이 되었고, 민족의 대중적 역량을 증대시키는 데 앞장서 많은 애국지사와 인재를 배출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철원의 명문 학교이다. 현재 철원초등학교는 12학급 20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사랑과 푸른 꿈이 영그는 철원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주인 된 학생, 사람 된 학생, 힘 있는 학생, 튼튼한 학생, 재능이 다양한 학생을 교육목표로 설정하여 교육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1899년 철원공립소학교로 문을 열다]

1895년(고종 32) 관보 칙령 143호에 의거 「소학교령」이 공포되면서 서울에 4개의 관립소학교가 설립되었고 각 지방관에게 관내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 중요 지역에 40여 개의 공립소학교가 개교하였다. 강원도에는 1896년 9월 17일 춘천공립소학교[강원도관찰부공립소학교]가 강릉공립소학교, 원주공립소학교와 함께 공식적으로 개교하였으며, 이후 회양공립소학교[1897년], 철원공립소학교[1899년], 금성공립소학교[1900년], 평강공립소학교[1903년], 김화공립소학교[1904년] 등 8개의 소학교가 차례대로 설립되었다.

철원초등학교는 강원도 내 8개의 소학교 중에서 춘천, 원주, 강릉, 회양에 이어 근대화를 표방하며 1899년 철원읍 사요리에 설립되었다. 철원에 소학교가 개교된 것은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함경도로 빠지는 길목에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고, 거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학교의 필요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기 때문이다. 1899년 11월 8일에 사범학교 속성과 제2회 졸업생인 황태성이 철원공립소학교의 첫 교원으로 임명되었고, 1899년 12월 7일에는 부교원으로 이병진이 부임하였다. 이후 1900년에는 부교원이 2명으로 늘어나며 김교은·윤진으로 교체 임명되었고, 통감부가 설치되기 전에는 군수가 교장을 겸임하였다.

1899년 철원공립소학교가 개교할 당시의 교사(校舍) 위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현재 철원읍 관전리 철원 노동당사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8·15 광복 당시 전교생 수가 2,6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강원도 제일의 학교였으나 안타깝게도 6·25전쟁으로 학교 수업은 중단되었고, 교사와 학적부가 모두 전소되었다. 철원공립소학교 때의 졸업생은 모두 고인이 되어 개교 당시나 소학교 때의 모습 등 당시 상황과 졸업생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철원 교육의 시련]

철원초등학교는 한반도의 중앙부이자 휴전선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유물을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철원에 자리하고 있다. 철원은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가 기상을 떨쳤고, 궁예태봉국을 건국하여 14년간 도읍으로서 영광을 누렸으며, 조선 후기 의병 운동에 이어 일제 강점기에는 활발한 항일운동이 벌어졌던 역사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옛 영화를 꿈꾸는 철원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학교이다.

수복 전[1899~1954]의 학교 연혁 및 역사를 살펴보면, 1899년 철원공립소학교로 개교한 뒤 1903년 철원읍 사요리에 있던 강원도립철원의원 전 부지에 목조건물 1동[8교실]을 신축하고 남녀반 2학급 4년제로 설립하여 1903년 4월 20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하였다. 이때 소학교는 심상과와 고등과 두 과로 나누고, 수업 연한은 심상과 3년, 고등과 3년으로 6년이었다. 1905년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일본은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06년 이전의 한국 교육이 내포하고 있는 외세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말살하기 위하여 1906년 통감부가 의도적으로 공포한 「보통학교령」에 의거하여, 철원공립소학교는 공립철원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일제는 수업 연한도 6년에서 4년으로 줄였고, 심상과와 고등과를 통합하여 이후 새로 시작하는 것으로 학교 행정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그 이후 학교 연혁은 1906년으로 정리된 것이 많아 철원초등학교도 졸업 횟수를 1910학년도부터 시작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1911년 3월 20일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8월 일제가 공포한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일제의 교육 통제 하에 놓였으며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한국 문화를 말살하려는 교육정책을 펼쳤고,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폐쇄를 서슴지 않았다.

1922년도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학제가 보통학교[4·5·6년]와 고등보통학교[5년]로 개편되었으며, 1922년 3월 4년제의 1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군 내의 인구 증가에 따라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338번지의 부지에 목조 교사 3동[18학급 편성]을 증축하고 부속 건물을 신축하여 1924년에 이전하였다. 1938년 4월 1일에는 교명을 공립철원보통학교에서 철원남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변경하였고, 1941년 4월 1일에는 철원남공립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 광복 후 1950년 6월 2일에는 각급 학교의 공사립 명칭 사용 폐지로 철원남공립국민학교에서 철원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교장에 김무길이 취임하였다.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 정신 함양에 힘썼던 철원초등학교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6년 과정의 24학급 2,600여 명의 학생을 자랑하는 도내 굴지의 학교였고, 인공 치하에서 37회, 38회, 39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6·25전쟁으로 교육활동은 중단이 되었고 교사와 학적부, 시설물이 모두 전소되어 지금은 지뢰지대로 변하였다.

[민족교육의 장으로서 맥을 잇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 성립과 함께 공산 치하였던 철원군은 1954년 10월 8년 만에 수복의 기쁨을 맞이한다. 철원국민학교는 수복 후인 1955년 4월 6학급으로 복구 인가를 받아 철원읍 화지리 현재의 위치에 천막 교실 7동을 설치하고 동송국민학교에서 남자 222명, 여자 170명 등 총 392명을 인수하여 10학급을 편성하여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1956년에는 정규 교사 7교실을 신축한 이후 계속 학생 수가 증가하여 14학급 편성에서 16학급으로 편성하는 등 학교 규모가 증대되었다.

1965년에 월하리 분실 설치 인가를 받았으며, 1966년에 월하분교를 인가받아 9개 교실 개축 공사와 도서관 18평[약 60㎡]을 준공하였고, 1969년에 월하분교장을 분리하였다. 철원초등학교는 그 규모도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 후반까지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여건 속에서 반공 교육으로 민주 수호 운동에 앞장을 섰다. 이후 1970년대 이후에는 남북통일을 대비하는 민족 통일운동을 펼치며 민족교육의 장으로써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1975년부터 ‘반공 웅변 철원군 대회’, ‘총력안보 및 충효 정신 학생 글짓기 대회’, ‘이승복 추모 학생 글짓기 대회’, ‘이승복 추모 웅변 철원군 예선 대회’ 등에 다수 참여하여 입상하는 등 그 맥을 이었다.

1981년 3월 5일에는 철원국민학교 병설유치원 설립 인가를 받아 4월 1일 병설유치원[2개 학급]을 개원하여 미취학 아동 교육에도 힘썼으며, 1983년에는 4~6학년 200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1986년에는 금강산댐 규탄 대회에 전교생이 모두 참가하는 등 반일 운동 및 반공 교육에 앞장을 섰다. 1996년 3월 1일에는 「교육법」 중 개정법률[제5069호]에 의거하여 철원국민학교에서 철원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2000년 12월 14일에 철원초등학교 홈페이지(http://cholcw.gwe.es.kr)를 개설하였다. 2003년 3월 1일 월하분교장을 본교에 통폐합하였으며, 2011년 11월 30일에 병설유치원을 단설 개원[새들유치원]하여 분리하였다. 또한 2003년 10월에는 철원초등학교의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수백 명의 동문들이 힘을 합하여 『철원초등학교 백년사』를 발간하고 이를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현재는 철원군의 초등학교 16개교 중에 4번째 규모로 12개 학급 200여 명의 학생과 교원 22여 명 모두가 행복한 철원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철원초의 어제와 오늘]

수많은 역사의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철원의 으뜸으로 자리 잡고 있는 철원초등학교는 민족교육의 산실로 민족의 대중적 역량을 증대시키는 데 앞장서 많은 애국지사와 인재를 배출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이다. 1899년 철원공립소학교 개교 당시 교사의 위치는 철원읍 관전리 철원 노동당사 부근으로 추정되며, 그 후 1903년 4월 20일에 철원읍 사요리에 목조건물 1동을 신축하였다가 학생 수의 증가에 따라 1924년 철원읍 사요리 338번지에 목조건물 3동과 부속건물을 신개축하고 교사를 이전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교사가 모두 다 소실되어 1955년 6월 19일 철원읍 화지리에 가교사 천막 7동을 세워 수복 후 반공교육 및 민족교육을 펼쳤다. 그 후 철원읍 화지리 66번지 현 위치에 부지 4만 1421㎡를 확보하여 운동장과 단층 정규 교실 7동 건립을 시작으로 현재는 일반교실 14실, 특별교실 1실, 컴퓨터실 1실 등이고 교사 대지는 1,894㎡, 체육장 3만 396㎡, 부속 토지 226㎡ 등 3만 2526㎡의 규모를 갖추었다.

철원초등학교의 교기는 1920년대, 196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네 번에 걸쳐 변경되었으나 거의 비슷한 형태로 철원초등학교 교표의 무궁화 꽃과 철원초등학교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교가는 1968년 졸업 앨범에 실려 있는 철원공립보통학교 교가의 가사가 가장 오래된 자료로 남아 있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교가는 수복 후 신영식이 노랫말을 쓰고, 김덕희가 작곡한 곡이다.

교훈은 1960년대에는 ‘1. 성실한 마음과 2. 튼튼한 몸으로 3. 열심히 배우고 4. 서로 도와 가며 5. 부지런히 일하자’였으며, 1980년대에는 ‘1. 기초를 다지는 교육 2. 품성을 다듬는 교육 3. 체력을 높이는 교육 4. 과학을 즐기는 교육 5. 정성을 다하는 교육’이었다. 1990년 이후 현재의 교훈은 ‘푸른 꿈이 영그는 즐거운 학교’이다. ‘사랑과 푸른 꿈이 영그는 철원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주인 된 학생, 사람 된 학생, 힘 있는 학생, 튼튼한 학생, 재능이 다양한 학생을 교육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교목은 ‘소나무’로 1903년 4월 20일 개교와 더불어 12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철원초등학교의 상징이다. 철원초등학교에서의 ‘소나무’는 ‘긴 세월 푸르름을 고이 간직한 채 눈서리 이겨 내고, 이슬비 내린다 해도 늘 푸르고 무르게 살아온 우리의 나무, 철원의 뜰 너른 터 배움의 터에서 푸른 꿈 푸른 이상 큰 나래 펴며 하늘 향해 끝없이 치솟는 우리의 나무처럼 끝없는 전진, 넘치는 패기로 꿈을 키워 가는 철원 어린이!’를 상징하고 있다.

교화는 1955~1996년도에는 ‘배꽃’으로 학교 주위 과수원에 봄이면 하얗게 피어나는 배꽃을 교화로 삼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과수원이 없어지고 학교 관사 및 부속 시설이 건립되면서 학교에서 배꽃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1996년 9월 1일에 ‘국화’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교화로 삼고 있다. 철원초등학교에서의 ‘국화’는 ‘찬 서리 이겨 내며 꿋꿋이 그 자태 잃지 않고 언제나 노랗게 청초한 모습 담아 늦가을을 물들이는 국화, 인내와 끈기는 우리의 철원의 상징으로 아름다움과 진실을 갈고닦아 온 세상에 피어난 노오란 우리의 꽃처럼 정열과 명랑한 생활로 끈기와 예지를 길러 꿈을 키워 가는 철원 어린이’를 상징하고 있다.

현재 철원초등학교의 학구는 철원읍 화지리 전역과 월하리, 관전리 등이다. 이 지역의 인구는 5,000여 명으로 점점 감소 추세이다. 이에 학교 규모는 1950~1960년대보다도 적어졌으며, 현재 12개 학급 20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 오후 돌봄이 필요하며, 월하리관전리 방면의 통학 버스를 이용하는 학생이 20여 명 있다. 지역적으로 휴전선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경제·교육 여건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열악하지만, ‘굳은 절개의 소나무와 순결한 배꽃과 같은 철원의 어린이’로 키우기 위하여 기초·기본 교육 충실, 자기 주도적 학습력 향상, 특기적성교육 강화 등에 역점을 두고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컴퓨터, 테니스, 줄넘기, 종이접기, 축구, 독서토론, 목공예, 십자수, 요가 등의 특별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매월 전교생이 참여하는 올림피아드경진대회를 시행하여 만점을 받는 어린이들에게는 과목별 으뜸상과 칭찬 스티커를 수여하고, 학년말 칭찬 스티커의 수에 따라 포상을 하고 있다. 2009년 여자 유도부가 창단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교내 소식지로 2003년 창간된 「철원 뉴스레터」가 발행되고 있다.

[의의와 역할]

철원초등학교는 1899년 개교 이래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 정신 함양에 힘썼으며, 6·25전쟁 당시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철원 교육의 중심인 반공 교육으로 민주 수호 운동에 앞장섰고, 이후 1970년대 이후에는 남북통일을 대비하는 민족 통일운동을 펼치며 민족교육의 장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교육적 의의를 지닌 철원초등학교는 전통을 이어 지금까지 철원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많은 인재를 길러 낸 초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해 왔다. 앞으로도 120년의 전통을 이어 철원 교육, 나아가 강원 교육을 선도하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철원 지역 발전의 주역으로 활동을 펼칠 인재 양성 요람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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