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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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墳墓 |
영어의미역 |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희돈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과거 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무덤.
[개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유적이 속속 발견·조사되고 있으나 매장 흔적이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무덤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무덤 조성에 들인 정성도 깊어져 당시의 문화와 역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무덤은 전통적인 토장묘 이외에도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발달한 토광묘(토확묘, 토갱묘) 등 토총 계통과 지석묘·석관묘·석곽묘·적석총 등이 있다.
무덤은 그 형태나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갈라지는데 이것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봉분의 형태에 따라 방형분(方形墳)·원형분·전방후원분으로 구분되고 봉분의 재료에 따라 토장묘(土葬墓)·지석묘(支石墓)·적석총·석총·토총·전축분(塼築墳)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유구(遺構)의 재료에 따라 석관묘·석곽묘·목관묘·목곽묘·옹관묘·도관묘(陶棺墓) 등 세 가지 유형에 15가지 정도의 종류로 갈라진다.
또한 우리나라 무덤의 변천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고조선-삼한시대에는 토장묘·토광묘·지석묘·석관묘·석곽묘 등이 있었는데 토장묘는 가장 먼저 발달한 무덤의 형태로서 상호 영향 없이 각 지역에서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토광묘는 중원(中原)지방의 전통적인 무덤형식으로 대동강 유역에 가장 많이 밀집 분포되어 있고, 다음으로 낙동강 하류유역에서 최근에 많이 발견되고, 그밖에 영산강과 한강 유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가장 독특하고 전통적인 무덤 형식이다. 지석묘에는 ‘탁자형(卓子形)·기반형(碁盤形)·변형’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탁자형은 지상에 장방형의 네 벽을 세우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놓은 형식으로 매장 주체 시설이 지상 석실에 해당되는데, 규모가 큰 것은 석실을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나누어 다수의 사체를 합장한 것도 있다. 기반형은 바둑판 모양으로 몇 개의 틀을 괴고 그 위에 윗돌들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매장 주체 시설은 지하에 마련된다. 변형은 지표에는 윗돌만 얹고 모든 시설은 지하에 마련하는 형식이다.
석관묘(石棺墓) 역시 토광묘처럼 지표에 분구가 없어진 평지 그대로이다. 석관묘의 구조는 지하 1m 쯤을 파고 구들장 같은 판상석 여러 장을 세워서 석관모양을 만들어 사체를 안장한다. 그러나 벽의 일부를 막돌이나 깬돌로 쌓기도 하고 바위가 있을 때는 그것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석곽묘는 원시 석실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대지(臺地)나 구릉 위에 지하 1.5m 이상 깊게 토광을 판 다음 바닥에는 돌을 깔고 천장은 나무로 덮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올린다. 이런 석곽묘는 중국의 요령 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부여 연화리 등 금강 유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석곽묘의 가장 큰 특징은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의식용으로 보이는 ‘검파형(劍把形)·방패형·원개형(圓蓋形)·나팔형’ 등 여러가지 형태의 청동기가 출토된 점이다. 따라서 석곽묘는 석관묘에서 보이는 청동기문화와는 그 계통을 약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돌을 이용한 무덤 중 적석총은 지면 위에 막돌을 쌓아올린 돌무더기와 같은 형태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정치·사회·문화 등 각 분야가 고루 발전하고 특히 국가 형태를 갖추면서 무덤에 대해서도 전 시대와 다른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적석총과 벽화고분, 백제에서는 전실분(前室墳)과 판석조석실분, 신라에서는 적석봉토분과 궁륭상천장식석실분(穹隆狀天障式石室墳), 가야에서는 장방형석실분,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토축묘 등이 그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은 경주 지역의 여러 왕릉과 화장묘가 잘 알려져 있다. 왕릉은 경주의 평지에 대형 단곽분으로 지증왕 무렵인 6세기 초까지 축조되다가 그 이후에는 경주 분지의 산기슭으로 옮겨가게 된다. 신라의 화장묘는 지하에 석함을 설치하고 그 안에 외호(外壺)와 내호(內壺)를 설치하는데 내호가 곧 골호이다.
고려시대에는 횡구식석실·석곽묘·토광묘·회곽묘(灰槨墓) 등이 채용되었다. 횡구식석실은 신라시대의 것과 비슷하나 막돌로 연도 없이 축조하였고 평천장이다. 석곽묘의 경우는 슬레이트를 잘 다듬어서 표면에 사신도를 선각(線刻)하고 묘지명을 묻은 경우도 있다. 석곽묘는 소형토광묘와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된 형식으로 지하에 비교적 깊게 장방형의 광을 하고 우두(牛頭)의 큰 돌로 1단 또는 2단으로 네 벽을 쌓고 판상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토광묘는 전통적인 목관용토광이다. 석관묘나 토광묘 중에는 머리 부위의 측벽에 부실(副室)을 만들거나 광벽에 벽장 같은 감실(龕室)을 만들어 부장물을 넣은 것도 있다. 회곽묘는 고려 말기에 비롯되어 조선시대에 성행한 형식이다. 토광 안에 생석회로 곽을 만드는데 겨우 관을 안치할 정도로 한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어느 형식이거나 분구는 토총이 주류이며 그 형상은 원형 또는 장방형인데 방형의 경우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두른다.
조선시대의 무덤은 고려시대의 전통 형식을 바탕으로 거기에 새로운 지도 이념인 유학 사상으로 보완되었다. 석곽묘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석실도 거대한 석곽 또는 석관형으로 변하였다. 외형은 초기의 원형과 장방형에서 중기 이후에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되고 묘비가 일반화되었으며 고관의 무덤 입구에는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칠곡의 선사 분묘]
칠곡에 남아있는 선사시대 분묘를 살펴보면 석전리 지석묘군은 상석의 크기가 대략 2~3m 정도로 훼손이 심하며 마을 입구 빈 터에 모여 있는데, 원래는 9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8기만이 보이고 있다. 7기는 한 곳에 모여 있고, 1기는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리 지석묘는 개석으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으며 형태는 장방형이고 크기는 230㎝×100㎝×45㎝이고 상면에 10여개의 성혈이 확인된다. 신리 지석묘군은 신4리 민가에 위치하여 5기의 바위가 2열로 모여 있다.
금암리 지석묘는 도로 동편, 동명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1기가 있고, 다시 북쪽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1기가 있으며, 도로 서쪽에도 2기가 있다. 지석묘 밑에는 석광(石鑛)이 있고, 그 속에서 돌칼(石劍) 1개, 화살촉(石鏃) 4개가 출토(出土) 되었다고 한다.
기성리 지석묘군은 동명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50~60m 가량 떨어진 구릉지대에 2기가 있는데 전부 도굴되어 석광이 보이고 있다. 이 석광 내에서 돌칼 1개, 화살촉 5개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황학리 고인돌, 봉암리 지석묘, 남율리 지석묘군 1·2·3, 남계리 지석묘 등의 지석묘가 남아있다.
[칠곡의 고분]
칠곡의 고분군은 출토된 유물과 고분 내의 석실(石室)의 형태 등으로 보아, 삼국 시대 초기에 속하는 고분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복성리 고분군은 고분 내의 석실이 화강암의 넓은 돌로 만들어진 것, 고분 내 석실을 주로 할석(割石)으로 쌓은 것, 내부가 석곽으로 된 것 등 분포된 지역에 따라 고분 내의 구조가 약간 다르게 나타나며 고분들의 외형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변 지역의 재료[石材]와 고분들의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직경 12m의 고분 4기를 비롯하여 7m의 고분 35기와 300여기의 작은 고분들이 있었는데, 현재는 거의 도굴로 훼손되었다.
심천리 고분군은 기념물 제 29호로 지정된 선돌[立石]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규모가 작은 고분들로서 길이가 1.5~2m 가량, 폭이 70㎝, 높이가 50㎝ 정도로 내부 석곽은 활석을 쌓았으며 개석이 없는 것이 많다. 석곽이 표면에 노출된 고분은 약 30여기에 달하고 있다.
다부리 고분군은 황학산 동쪽 능선을 따라 폭 50m, 길이 300m 정도 범위에 봉토, 적석(積石), 석곽묘 등이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다. 경사가 급해 봉토는 거의 깎인 상태이며 발굴조사 결과 부장유물은 극히 소박하며 5세기 후반~6세기 중엽의 토기 195점과 철기, 귀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무림리 고분군은 비교적 큰 편에 속하며 길이가 약 9m인 고분 2기와 길이 6m 가량인 고분 10기가 있으나 약 절반 가량이 발굴되었다. 봉산리 고분군은 고분이 많지 않으나 흩어진 조그만 고분 몇 기와 길이가 약 6m인 고분 2기가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남계리 고분군도 고분의 숫자가 많지 않으나 길이가 6m 가량인 고분 4기가 비교적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이 외에도 매원리 고분군 1·2, 아곡리 고분군, 어로리 고분군, 오평리 고분군, 창평리 고분군 1·2·3, 영오리 고분군, 오산리 고분군, 용산리 고분군 1·2, 금암리 고분군, 봉암리 고분군, 학하리 고분군, 석우리 고분군 1·2, 성곡리 고분군, 남율리 고분(군), 교리 고분군, 무림리 고분군, 영리 고분군 등이 있다.
[칠곡의 고려·조선시대 민묘]
고려와 조선시대 분묘는 율리 분묘군으로 율리 안배미마을 동편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분묘는 대략 6기 이상의 분묘로 조성되어 있고 그 중 1기는 봉분이 함몰되어 있으며 다른 분묘들도 봉분이 삭평된 상태이다. 구릉 정상부의 분묘 1기는 아직 봉분의 흔적이 뚜렷한데 그 크기는 높이 1.5m에 직경 5~6m 정도이다.
지천면 신리에는 수남이라는 노비가 임진왜란 때 상전의 집안을 지켜 후사를 보전케 한 것을 기리기 위해 광주이씨 집안에서 조성한 무덤으로 전해지는 신리 충노수남지묘가 있는데 그 크기는 봉분의 직경이 3~4m에 높이는 1m 정도이고 ‘충노수남지묘(忠奴守男之墓)’라 새긴 작은 호패형의 화강암 묘비가 있다. 달서리 분묘군은 해발 406m의 자봉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말단부에 해발 140~240m까지 길게 분포하며 약 20여기가 확인된다. 분묘는 대부분 도굴되었고 상부 석곽이 노출되어 있다. 규모는 저변 직경이 5m, 석곽은 폭이 30~40㎝ 정도이다.
창평리 분묘군은 3곳에 위치해 있는데 유구는 광주이씨 민묘에 의해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유적이 있는 능선 동편의 능선 말단부에도 분묘가 확인되고 600m 떨어진 재궁마을 뒷산에도 역시 분묘가 있으며 창평지 동편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이 일대는 고분을 비롯해 분묘, 민묘가 집중적으로 들어섰던 공동 묘역으로 추정된다. 심천리 분묘는 개정지마을에서 보면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해발 105m 지점의 능선에 위치한 분묘로 봉분이 삭평되어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도굴된 듯 보이며 대강의 석곽형태만 갖추고 있다. 분묘의 크기는 직경이 대략 5.3×4.2m이다.
낙산리 분묘군은 2군데에서 발견되는데 모두 약 10여기의 분묘가 확인된다. 대부분 도굴되었으며 석곽이 노출되어 있고 몇몇 석곽은 한쪽을 자연암반을 이용해 벽을 대신하고 나머지를 할석으로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황학리 분묘군 또한 2곳에서 발견되었는데 황학리 수정이마을 북동쪽과 남동쪽 능선에 위치한다. 분묘의 저변 직경은 3~4m 정도이고 주변으로 토기편이 확인된다. 이 외에 기타 무덤으로 덕산리에 말무덤이 있는데 덕뫼 마을회관에서 길을 따라 남쪽으로 20~30m 정도 내려가면 덕산들로 난 곧은길을 만난다. 이 길을 따라 700m 정도 들어가면 남북으로 지나가는 관개수로를 만나는데 이곳에 마을에서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규모가 큰 무덤이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