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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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相喆 |
영어음역 | Yi Sangcheol |
이칭/별칭 | 윤길(允吉),아산(雅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헌규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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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성별 | 남 |
생년 | 1826년 |
몰년 | 1886년 |
본관 | 광주 |
[정의]
조선 말기 칠곡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윤길(允吉), 호는 아산(雅山).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이집(李集)을 중흥시조로 하고,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를 칠곡 입향조로 하는 광주이씨의 후손이다. 대사헌 이박곡(李朴谷)의 후손으로 증 이조참판 이건수(李建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순천박씨, 부인은 옥산장씨이다.
[활동사항]
1870년(고종 7)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1875년(고종 12)에 대원군이 중국 보정(保定)으로 축출되자, 1874년(고종 11)에 유생들과 대원군 청환(請還)을 상소하였다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고, 6년 후 충청도 황간으로 배소를 옮겼으며 4년 후 용서받고 돌아왔다. 사미헌 장복추가 시를 지어 ‘아! 그대는 무슨 일로 먼 고을에 머물게 되었는가? 오직 속에서 울어 나오는 마음 있어 나라 위해 근심했기 때문일세! 옛 군자도 끝내 면(免)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진사가 오히려 옳은 데도 유배되니 어쩔꼬?’라고 하였다. 유배에서 돌아와 경상북도 칠곡군 매원리에서 살았으며 아산재(雅山齋)를 건립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완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