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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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谷祠堂 |
영어의미역 | Bakgok Shrine |
이칭/별칭 | 박곡고택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3길 30-3[매원리 367]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태훈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매원마을에 있는 이원록의 사당.
[개설]
본관이 광주(廣州)인 박곡(朴谷) 이원록(李元錄)[1629~1688]은 조선 숙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문신이다. 자는 사흥(士興)이며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1651년(효종 2)에 진사에 장원하여 세마에 제수되었다. 1663년(현종 4)에 식년문과의 을과에 수위로 급제하여 이천현감·장연부사를 거쳐 숙종 1년에 의주부윤으로 나아갔다. 공은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대관의 총수인 대사헌직에 다섯 차례나 연임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내간상을 당하니 관직을 사임하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이 지은 묘비문과 문집이 있다. 매원마을 대사헌 이원록의 본가인 박곡고택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최근 안채와 문간채, 사당을 복원하였다.
[위치]
매원리 상매마을과 중매마을 사이에 위치한다. 매원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매화낙지형에 속하는 길지(吉地)이다. 사당은 나지막한 야산 능선 끝자락에 남향으로 앉아있으며, 앞의 동정천과 사창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당 동쪽의 상매마을에는 박곡의 후손 이동유(李東裕)가 18~19세기에 지은 해은고택이 있다.
[형태]
소실된 박곡고택은 안채가 12칸, 사랑채가 8칸, 광채가 3칸, 대문채가 5칸이며 중문 채와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고택이었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 안채와 문간채 등 만 복원된 상태이다.
‘-’자형의 사당은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1.5칸이다. 평면 구성은 일반 사당 형식과 평이한 형태로 3칸 내부를 통간으로 구성하고 마루를 깔고 위패를 모셨다. 전면으로는 반칸의 퇴를 두고 마루를 깔았다. 퇴의 측면은 심벽으로 막았다. 전면 각 칸에는 쌍여닫이 당판문을 세 곳에 설치했다. 중앙의 문은 신문(神門)으로 사람이 드나들 수 없으며 항시 우측의 문으로 들어가서 좌측의 문으로 나오는 것이 예이다. 하지만 박곡사당은 전면 기단 중앙부에 계단을 두고 정면 어칸으로 진입이 이루어지게 했다. 이것은 근현대로 오면서 형식이 축소되고 편의적 사고로 인한 결과라고 판단된다.
4대 봉사 후 묘사로 일괄 제를 지내는 가묘와 달리 불천위 사당은 영원토록 위패를 집안 사당에 모시게 된다. 그리하여 사당은 특별히 좀 더 격식과 품위를 따져 건립하게 되고 대대로 자긍심을 가진다. 구조는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 위에 사각, 팔각의 전병주초를 앉힌 다음 전면에만 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워 상부가구를 받고 있다. 주 상부는 익공으로 처리해 주두, 대들보를 결구시키고 주간의 장혀와 창방 사이는 소로를 끼워 넣은 초익공형식이다. 가구는 3량가로 단아한 구성을 하고 있고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처마 끝에는 막새와 내림새를 달고 측면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다.
[현황]
사당의 일곽을 별도로 구성한 방형의 토석담장 안에 ‘-’자형의 맞배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지형은 건물 배면 쪽이 높고 정면 쪽이 낮게 처리했으며 담장 안으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근래에 중건된 사당으로 건축사적 가치는 희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