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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145
한자 風水地理
영어의미역 Pungsu|Feng Shu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정의]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땅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개설]

풍수지리란 산의 배치와 물의 흐름, 지형과 방위, 하늘과 땅의 기운 등을 고려하여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충주 지역의 풍수지리는 삼국시대부터 언급되고 있으나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켜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 지리서를 통해서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와 같은 백과사전류에도 충주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 그리고 풍수지리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충주의 풍수지리]

충주의 풍수에 대해서는 삼국시대부터 기록이 있었겠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충주 지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6년(아달라 이사금 3)에 영남으로부터 충주로 넘어오는 고개인 계립령(하늘재)가 열렸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충주의 옛 이름이 국원성(國原城) 또는 중원경이었는데 이것 역시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성 또는 한가운데 있는 중요한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충주의 풍수지리가 산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몽고병이 충주성을 도륙하고 또 산성을 치니, 관리와 노약자들이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바람·비·우뢰·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치지 않고 물러갔다.” 1256년(고종 43) 몽고군이 충주 월악신사에서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물러갔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바로 충주가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충주의 풍수지리]

충주에는 계명산(鷄鳴山)남산(南山) 그리고 대림산(大林山)이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산 너머로는 남한강과 달천강이 휘돌아 흐른다. 그러므로 이들 3개의 산과 2개의 강이 충주의 풍수지리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충주의 주산은 계명산이고 조산 또는 안산은 대림산이었다. 그리고 달천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충주에 복과 기운을 쌓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풍수지리적으로 충주가 외부와 소통하는 방향은 서쪽이었다. 달천강이 남북으로 흐르다 남한강과 합수된 다음 계속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달천강에 놓인 나루를 통해 북쪽으로 나가기도 하고, 서쪽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므로 충주는 풍수지리적으로 천연의 요새였다. 서쪽의 달천강과 남한강이 자연스런 해자를 형성하고 동남북의 높은 산이 자연스럽게 성채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충주를 풍수지리적으로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림산 주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대천(大川)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청풍(淸風)으로부터 시작하여 충주 서남쪽으로 흘러 여강(驪江)이 된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祀)로 한다. 양진연소(楊津衍所) 봄가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덕천진(德川津) 주(州)에서 5리에 있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풍(淸風)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죽산(竹山)에 이르기 90리, 남쪽으로 음성(陰城)에 이르기 50리, 북쪽으로 원주(原州)에 이르기 40리이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민간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충주의 풍수지리]

『신증동국여지승람』제14권 충청도 충주목조에 보면 경계, 건치 연혁, 진관,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 산천 등이 나온다. 이 중 풍속, 형승, 산천이 풍수지리에 해당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충주는 서울의 남쪽 방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백성의 풍속은 검소한 편이다. 그리고 산으로는 대림산, 월악산, 개천산, 가섭산, 장미산, 천등산 등이 있다. 강과 하천으로는 한강과 달천이 있고, 여울과 나루로는 월탄, 금휴포, 북진, 진포 등이 있다.

“풍속: 백성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 형승: 남쪽 방면의 요해처에 자리 잡고 있는 땅이다. 산천 대림산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이숭인(李崇仁)의 시에서는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라고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

북진(北津)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금휴포(琴休浦) 어구에는 외로운 돛이 멀고, 월락탄(月落灘) 머리에는 흰 물결이 평평하다.” 하였다. 달천(達川)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 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 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타난 충주의 풍수지리]

앞에서 언급한 책들이 관찬 사서라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개인이 쓴 역사지리서이자 백과사전이다.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 천지편 지리류 주군(州郡)조 ‘충주형승변증설’에서 이규경은 충주를 풍수와 형승이라는 측면에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규경에 의하면, 충주는 경상 좌도와 우도로 가는 사람들이 길을 달리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좌도로 가는 사람은 충주에서 죽령을 넘고, 우도로 가는 사람은 조령을 넘는다.

충주는 나라의 중앙에 있어 서로 차지하려고 쟁패하던 지역이었다. 이규경은 그 때문에 충주가 오히려 살기 좋은 지역이 아니라 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 때문에 항상 살기가 충천하고 태양이 빛을 발할 수 없다. 지세가 서북으로 달려가는 형상이며, 그 기운이 쌓이고 머물 여유가 없다. 그래서 예부터 부유하고 후덕한 사람이 적다. 백성들은 그 숫자가 많아 항상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가히 오래 살 만한 곳이 못 된다(而常時殺氣衝天 白日無光 地勢走瀉西北 無停蓄之氣 故亦少富厚者 人民稠衆 常多口舌浮薄 不可久居之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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