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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77
한자 廣反石部曲
영어의미역 Communities of Low Caste Laborers, Gwangbanseok
이칭/별칭 사을미(沙乙未),사을미(沙乙味)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고려시대
시행연도/일시 고려시대
폐지연도/일시 15세기 후반경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개설]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충주목에 설치된 광반석부곡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청된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 군현제의 하부기구로 예속시키고 군현제를 통해 간접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충주목에 편제되었던 광반석부곡 또한 이러한 부곡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12세기 이후 고려 사회의 변동과정에서 민(民)의 의식이 성장하여 신분해방을 천명하는 노비들의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곡민이 이에 합세하는 일들이 벌어지자, 무신정권은 부곡민을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외침에 저항한 군공 포상 등의 형태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기도 함으로써 사실상 고려의 신분질서와 체제는 해체의 길을 걸었고, 부곡제도 그러한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갔다.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충주목 기록에는 “부곡(部曲)이 셋이니, 소잉림(所仍林)·광반석(廣反石)·감내며(甘內旀)이다.”라고 하여 광반석부곡이 충주에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광반석부곡의 속성이 둘이니, 최(崔)·안(安)이다.”라고 하여 부곡인의 성씨도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광반석부곡, 주(州) 동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사을미(沙乙未)라고 일컫는다.”라고 하여, 16세기 편찬 당시 이미 일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사을미(沙乙味)는 본래는 광반석부곡이었는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라고 하여 사을미의 한자(漢字)를 달리 표기하고 있을 뿐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변천]

광반석부곡은 고려시대부터 충주목에 설치되었던 지방의 특별행정구역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광반석부곡이라고 하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의 지명이 사을미(沙乙未)라고 하였다. 따라서 15세기까지는 부곡으로 남아 있다가, 16세기 이전에 일반 군현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사을미’는 ‘살미’로 음운이 축약되어, 현재의 충주시 살미면으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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