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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03
한자 西學
영어의미역 Western Learning School
이칭/별칭 조선서학,태서인지학,서태자학,천주학,사학(邪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욱

[정의]

조선 중기 이후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전래된 서양의 학문 및 종교.

[개설]

조선시대 선조 이후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문물과 한역(漢譯)된 서학서가 전래되었다.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조선 학자들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서학이라는 용어는 협의로는 천주교를 가리키기도 하나, 광의로는 서양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경향을 뜻한다.

18세기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연구와 도입은 더욱 활성화되었으나, 서학의 정신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천주교는 박해를 상당히 받았다. 그 이유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고, 하느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곧 임금과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논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조 이후 개항 이전까지 천주교는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으며,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도는 갈수록 늘어났으며, 결국 개항 이후 천주교는 공인되기에 이른다.

[천주교 전파]

충주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어 1784년 서울, 경기도의 양근·여주 일대, 충청도의 내포, 전라도의 전주와 함께 천주교도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한 지역이다. 충주에 천주교도들이 많았던 것은 1795년 이가환(李家煥)을 충주목사로 임명하는 이유로 호서지방에 천주교가 치성하며 특히 충주가 심했음을 들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충주에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충주가 남한강을 통해 양근, 지평과 문화적으로 교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초기 천주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권일신의 영향 때문이다. 이중환의 기록에 “충주는 한강 상류에 있으므로 물길로 왕래가 편리하므로 예부터 이곳에 사대부가 많이 살았다”는 내용처럼 충주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양근·광주 등의 지역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양근의 권철신 일가는 충주를 통혼권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인척관계를 통해 천주교가 충주에 전해졌다. 예를 들어 충주의 천주교도인 이기연은 권일신의 조카를 사위로 삼았으며, 이재섭은 권철신의 사위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충주에서는 양반이 주축을 이룬 교회가 성립되었다.

이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충주의 천주교도는 오히려 늘어났다. 그 이유는 천주교도들이 정부의 박해를 피해 숨어든 곳이 영남대로 연변의 산간 지역이었으며, 충주가 바로 영남대로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충주는 순교의 땅이 되었다. 특히, 현재의 교현동성당이 자리한 야현 풀무고개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있는 마즈막재는 순교자 전설이 자리한 현장이다.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은 마즈막재를 넘어와 숲거리에서 처형되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피를 바탕으로 충주의 천주교도는 더욱 늘어났던 것이다.

[대표적 천주교도]

충주는 순교자만 112위에 이르는 순교의 땅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남종삼(南鍾三)을 들 수 있다. 남종삼은 충주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18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으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초기에는 남종삼을 통해 프랑스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그것이 무위로 그치면서 천주교를 박해했다고 전한다.

남종삼은 관직생활 중에 천주교 교리와 충돌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에 참가해야 하는 등 갈등을 겪다가 관직을 떠났다. 가정으로 돌아와서는 집안을 보살피며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외국 신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1863년 생활의 궁핍 때문에 관직에 나섰으나,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서 체포되어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洪鳳周)와 함께 순교하였다.

[역사적 의의]

천주교는 비록 종교의 형태를 띠고 확산되고 전개되었으나, 천주교의 전파는 전통적 사회의 봉건적·윤리적·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천주교가 내세우는 인간평등관은 전통적인 신분제와 직업관, 사회규제의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원리의 수용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의 수용은 새로운 종교의 수용과 함께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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