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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30
한자 鳥嶺
영어음역 Joryeong
영어의미역 Joryeong Pass
이칭/별칭 초재,새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고개|교통로
관련문헌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지리지』|『경상도속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의]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개설]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동래(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였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조령은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있으며, 이들 관문과 성벽은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다. 이 중 제3관문을 지나면 경상북도이다. 추풍령을 통과하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지금은 관광로가 되었다.

[명칭유래]

조령의 옛 명칭인 초재[草岾]는 『고려사(高麗史)』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등에 기록되어 있다. 초재란 ‘풀고개’란 뜻으로, 풀이 무성한 계곡을 지나는 고갯길이기 때문으로 이렇게 불렸다.

‘새재’라는 명칭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는데, 구로(계립령)에 대한 새로 난 길이란 의미이다. 일반 서민 대중은 ‘초재’를 새로 난 고갯길이란 뜻에서 ‘새재’라고 불렀고, 이 ‘새[新]’는 ‘새[鳥]’와 음이 같아 ‘새재’를 잘못 의역하여 ‘조령(鳥嶺)’이라고 한자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형성 및 변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1350년(충정왕 2)부터 조운이 부활되는 1390년(공양왕 2)까지 40여 년간 왜구의 약탈을 피해 영남 지방의 세곡은 육로로 운송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수도와 영남 사이를 연결해주는 새로운 길로 가장 험준한 길인 초재가 개척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요성이 더해져 세미(稅米)의 운송뿐만 아니라 일본 사절의 왕래 등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로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서울 방어의 전초처로서 군사적 요충지였고, 숙종 때는 축성을 하여 지킴으로써 중요성을 더하였다. 고려 말부터 경상도의 세미 운송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조령은 1792년(영조 36) 이후 중요성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1792년(정조 16) 이후부터 경상도의 대동전(大同錢)을 서울로 육운하면서 중요성이 더욱 감소하였다.

일본 사절도 1811년(순조 11)을 마지막으로 끊어지게 되었고, 대일 공무역도 중단되었다. 또한 왜관을 중심으로 한 사무역도 1747년(영조 23) 이후 부연무역(赴燕貿易)을 엄금함에 따라 중·일 교역은 나가사키에서 직접 이루어지게 되어, 무역상품의 유통로로서 지녔던 기능도 상실하였다. 영조 이후 평화가 계속되면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도 점차 상실해갔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경상도 선비도 대폭 줄어들어 일반인의 통행도 줄어들었다. 더욱이 조령은 1904년 경부선 철도가 준공되어 그 전에 조령로가 했던 역할을 대행함으로써 더욱 쇠퇴하였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문경읍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약 2㎞를 가면 진안이다. 여기서 국도 3호선은 서쪽으로 가고 조령은 북쪽에 위치한다. 진안에서 4㎞를 가면 횡성이 길을 막고 문루가 나타나는데, 이 성은 『문경현읍지』에 의하면 초곡성(草谷城)이고 문루가 주흘관(主屹關)이다. 이 주흘관을 조령 제1관문이라 부른다.

주흘관에서 1.5㎞ 북쪽에 전조령원지(傳鳥嶺院址)가 있다. 여기서 약 1.5㎞ 북쪽에 또 하나의 관문이 나타나는데, 이 성이 『문경현읍지』에 기록된 중성(中城)이며 문은 조곡관(鳥谷關)이다. 흔히 조령 제2관문이라 한다. 조동문에서 약 2㎞ 북쪽에 동화원지(桐華院址)가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약 1㎞를 가면 영상(嶺上)에 도달하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된다.

여기에 성을 쌓고 문루를 세워 조령관(鳥嶺關)이라 하며 흔히 조령 제3관문이라 한다. 조령관에서 서북 2㎞ 지점 옛 고사리면 소재지에 신혜원(新惠院)이 있고, 신혜원의 이름을 따서 신혜원마을이라 부르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신풍리의 한 마을이다. 신혜원에서 서북으로 약 1㎞ 가면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가는 국도 3호선과 만나는 소조령(小鳥嶺)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의 조령은 일반적으로 문경 제1관문에서 소조령까지 약 10㎞의 고갯길을 말한다.

[관련기록]

충주는 조령의 북쪽에 위치하여 조령을 넘는 사람과 물자가 이곳에 모여 서울과 호서 지방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반대로 서울과 호서 지방 등의 여러 곳에서 충주에 모여 조령을 넘어 영남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경상도의 세곡은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에 모여 서울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충주는 조령을 넘어 서울과 영남으로 왕래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한강을 연한 수백 리가 모두 적의 공격을 받게 되므로, 충주를 보존하려면 조령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조령의 험준함을 막지 못하면 충주 또한 지킬 수 없다면서, 조령을 지키고 충주를 보존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따라서 충주에는 조령로가 여러 면에서 역할이 증대되던 조선 전기에 충청도 감영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조령과 추풍령 사이에 있고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관방중지로서 무신 김명윤을 충주목사로 삼아 군병을 조련하게 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시발(李時發)이 영(營)을 설치하여 죽령과 조령의 방어를 담당했고, 인조 때에도 이러한 시각에는 변함이 없어 검토관(檢討官) 유철(兪㯙)은 “조령의 형세는 실로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천험의 요새지입니다. 충주는 조령 아래에 있고 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으로 병영을 옮겨 설치한다면 좋을 듯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현종이완(李浣)조령에 영진(營鎭)을 설치하고 산성을 쌓아 충주의 군졸을 남한산성에서 떼어내어 조령을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현종 대의 이러한 이완의 주장은 1708년(숙종 34)에 조령산성의 축조로 나타났다. 그러나 영조 이후 조령로가 중요성을 점차 잃어가면서 충주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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