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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41
한자 牧溪
영어음역 Mokgye
이칭/별칭 산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일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
관련문헌 『해사록(海槎錄)』|『여지도서(輿地圖書)』|『충청도읍지』|『충주군읍지』

[정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의 옛 이름.

[형성 및 변천]

목계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형성된 촌락이 아니고, 목계가 가지는 자연 지리적 이점에 의하여 조선 후기인 1750년 이전에 이미 내륙의 상항(商港)으로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 되었다. 한강의 가항구간 중 중간에 위치하여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집산될 수 있는 지점이어서, 한강을 항행하는 모든 배가 운행이 가능했고,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목계는 1900년대 초까지도 충주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다. 1909년 충주 지역 장시 가운데 목계장이 장날 운집인구 500명, 거래금액 600원으로 지역에서 최고의 장시로 번창하였다. 1909년 충주를 중심으로 한강을 왕래한 선수(船數)는 영춘 65척, 단양 71척, 청풍 441척, 충주 250척, 계 827척이다. 이 때 충주 42척, 청풍 22척, 계 64척이 있어 물자를 수송했다. 1913년 내국통운주식회사 소유 선박 일선형 범선(돛단배) 8척이 충주~용산(서울) 간 화물을 수송했고, 그 중심지는 목계였다.

이후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조선시대의 한강 수운이 쇠퇴하고,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육상교통로가 충주가 아닌 대전을 통과하면서 충주의 관문인 목계가 쇠퇴하게 되었다. 1948년 소금배의 통행이 중단되면서 목계는 쓸쓸한 강촌으로 변하였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목계는 지금의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관련기록]

목계 지역이 처음 기록에 나타나기는 1636년(인조 14) 김세렴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면서 지은 『해사록(海槎錄)』이다. 1760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산계리(山溪里)’로 기록되었다. 이후 1780년(정조 4) 편찬된 『충청도읍지』와 1899년 편찬된 『충주군읍지』, 1912년 편찬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산계리’로 기록되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작성한 『지적조사부』에서 비로소 ‘목계리(牧溪里)’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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