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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753
한자 旌門
영어의미역 Memorial Gate
이칭/별칭 정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강민식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

[개설]

정문이란 정려(旌閭)라고도 하며,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여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대개 붉은 살을 두른 사방 한 칸 형식이나 문중 정려를 한 곳에 모아 여러 칸으로 만들거나 가옥의 출입구에 현판을 단 경우도 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유교적인 지배 윤리가 강화된 조선 후기에 더욱 활발하게 건립되었다.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명분을 잃었으나, 오히려 예론(禮論)을 통해 권력의 기반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양란 이후 새로운 사회적 변화 속에서 조정으로부터 충·효·열의 정문을 받는 것은 양반 신분을 유지하거나 양반으로 새롭게 편입할 수 있는 통로였다. 조정에서는 충신·효자·열녀의 가문에 정문을 건립하고 복호(復戶: 역(役)을 면해 주는 것)·관직·재물 등을 내렸다.

[현황]

충주의 정문 가운데 지정문화재로는 충주 연안이씨 쌍효각(延安李氏雙孝閣)이 있다. 충주 연안이씨 쌍효각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6호로 동량면 대전리 1697-5번지[대전리1길 25]에 있다. 1722년(경종 2) 이시희(李時熙)이시걸(李時杰)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효종 때 증직되고 명정되었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고, 또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는 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지고 복호되었다고 한다.

1878년(고종 15)에 살미면 신당리에 건립된 효자각이 충주댐 수몰지구에 편입됨에 따라 1983년 후손들이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정문은 앞면 1칸, 옆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사면을 홍살로 둘렀다. 안쪽에는 쌍효각기(雙孝閣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쌍효여정비(雙孝閭庭碑)가 있다. 쌍효여정비는 1737년 후손 성보(城輔)가 쓴 것이나, 유실되었다가 1878년에 되찾아 비로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둘레는 돌담장으로 두르고 입구에 솟을대문을 세웠다.

그 밖에 비석 형태나 해방 이후 건립된 사례를 제외하고 충주에 전하는 정문은 충신문으로 박팽년(朴彭年) 충신문과 조웅(趙熊) 충신문이 있고, 효자문으로 임형업(林亨業) 충효각, 김극충(金克忠) 효자각,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부문, 전오석(全五錫) 효자문, 박효인(朴孝仁) 효자효부문, 삼대(三代) 효자문, 이시진(李時振) 효자각, 전주이씨 사정문, 양여공(梁汝恭) 효자각, 진후(陳厚) 효자각, 이성국(李誠國) 효자각, 유완(柳琓) 효자문, 조재의(趙在義) 형제(兄弟) 쌍효각이 있으며, 열녀문으로는 문화유씨(文化柳氏) 열녀문과 전주이씨 충렬각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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