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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878
한자 金克亨
영어음역 Gim Geukhyeong
이칭/별칭 태숙(泰叔),사천(沙川),운촌(雲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춘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05년(선조 38)연표보기
몰년 1663년(현조 4)연표보기
본관 청풍
대표관직 공조좌랑|화순현감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 아버지는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인백(金仁伯)이다.

[활동사항]

박지계(朴知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30년(인조 8) 식년시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스승 박지계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상소하여 구명했고, 1635년(인조 13) 박지계가 별세하자 1년 동안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마음으로 옷차림과 행동을 조심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란을 피해 호서(충청도의 별칭으로 제천 의림지의 서쪽)의 산골로 들어갔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창릉참봉(조선 제8대 예종의 능과 안순왕후 한씨의 능을 관리하는 벼슬)과 동몽교관(조선 전기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각 군현에 둔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고향인 광주(廣州) 백운산 아래에 살면서 학동들을 가르쳤다.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 위솔(衛率), 공조좌랑을 거쳐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여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힘썼다.

[학문과 사상]

김극형은 학문에 정진하고 배움을 실천하는데 있어 어긋남이 없었다. 송시열(宋時烈)과 서한으로써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만년에 자신의 주장이 잘못됨을 깨닫고 고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사천집(沙川集)』, 『청풍세고(淸風世槁)』가 있다

[묘소]

김극형 묘와 김극형 신도비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능암에 있다. 탄금대에서 중앙탑 방면 지방도 520호선을 따라 가다가 중앙탑에서 지방도 599호선을 이용해 가흥 방향으로 간다. 가흥 삼거리에서 옛 국도 38호선을 이용하여 앙성 쪽으로 약 2㎞ 정도 가면, 왼편으로 봉황자연휴양림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좌회전하여 약 1㎞ 정도 들어가면 왼쪽으로 성산교회가 보인다.

조금만 더 가면 봉황리 마을자랑비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우회전한다.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능암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과수원 뒤편으로 김극형 신도비가 있다. 보령사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위로 올라가면 보령사라는 암자가 있고 암자의 뒤편 밭으로 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보령사에서 보이는 산의 정상에 김극형 묘가 있다.

그러나 2006년 묘역을 새롭게 정비한 뒤에 마을로 진입하기 전의 갈림길에서 직접 오를 수 있도록 작은 지름길을 만들어 놓아 쉽게 찾을 수 있다. 김극형 묘는 김극형김극형의 두 처 청송심씨와 광주정씨의 합장묘이다. 관리는 청풍김씨 종중에서 하고 있다.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힌다

[상훈과 추모]

마을 입구의 묘소가 위치한 산의 아래에 있는 과수원 뒤편에 위치해 있는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구조는 지대석, 비신, 그리고 옥개석으로 일반 비석의 구조와 같다. 비문은 박세채(朴世采)가 찬하고 김남순이 글씨를 새겼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15 행정구역 명칭 현행화 가금에서 중앙탑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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