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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285
한자 五-十選擧
영어의미역 5.10 Election
이칭/별칭 제헌국회의원선거,제1대 국회의원선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거
발생(시작)연도/일시 1948년 5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8년 5월 10일
발생(시작)장소 남한 전국[제주도 제외]
관련인물/단체 김기철|이희승|윤길섭|이병택|대동청년당|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정의]

1948년 5월 10일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역사적 배경]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8월 12일 완전히 결렬되어 한국 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9월 17일 유엔 총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였다. 9월 21일 유엔 총회 운영위원회가 유엔 총회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통과시키고, 23일 본회의에서 의제 채택을 통과시킴에 따라 유엔 총회 제1차(정치)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심의되었다. 남북한 총선거와 외국군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의 날카로운 대립을 겪으면서, 11월 14일 유엔 총회 본회의에서 미국 안이 43 대 0(기권 6)으로 채택되었다.

1948년 1월 24일 유엔 임시위원단의 소련 점령 지역 입경이 거절당하자 유엔 소총회에서 채택된 2월 26일 결의안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 지역 선거를 유보한 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계획이었으나, 북한에서 선거가 불가능함에 따라 남한만 200석을 할당하였다.

[경과]

총선거일이 5월 10일로 확정되자 3월 17일 미군정 법령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되었다. 3월 20일부터 4월 9일까지 20일간의 유권자 등록 기간에 총유권자 813만 2517명 중 96.4%에 해당하는 784만 871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고, 5월 10일 투표일에는 선거인 등록자 중 95.5%의 투표율을 보였다.

선거 결과 정당사회단체별 당선자 현황은 무소속 85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8명, 대동청년당 12명, 조선민족청년당 6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기타 11개 정당 및 단체 소속 각 1명 등이었다. 이 기간 동안 5·10선거를 둘러싼 좌우 대립은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5월 31일에는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해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다(국회의장 이승만, 부의장 신익희).

한편, 선거 실시를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어 충청북도 경찰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충청북도 전체 선거 관계자 1,500여 명 가운데 충주의 경우 피검자가 38명, 송청자는 22명에 달하였지만, 제천(피검자 234명, 송청자 199명)·영동(피검자 457명, 송청자 146명)·청주(피검자 399명, 송청자 333명) 지역과 비교하면 5·10선거 과정에서 충돌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고 추측된다.

[결과]

충청북도 제10선거구였던 충주에서는 대동청년당 소속 김기철(金基喆)[30세]이 29,457표를 얻어 7,724표를 얻은 이희승(李熙承)을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무소속 윤길섭(尹吉燮)은 2,721표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병택(李秉澤)은 7,234표를 얻었다.

[의의와 평가]

제헌의회가 성립됨에 따라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남한 단독으로 치러진 5·10선거가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평가와 한국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는 평가 등으로 갈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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