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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292
한자 三-十示威
영어의미역 3.10 Demonstr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60년 3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60년 3월 10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주고등학교
관련인물/단체 홍병각|충주고등학교

[정의]

1960년 3월 10일 충청북도 충주시 충주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1960년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사망함으로써 자유당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은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이 나이가 많아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대통령직을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 선거 운동을 자행하였다.

불법 선거 운동은 충주 지역에서도 이루어졌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진영의 충주 유세를 경찰력을 동원하여 방해하는 등 노골적으로 선거 방해 공작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때 경찰과 대치했던 충주고등학교 학생들의 분위기도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경과]

3월 10일 충주고등학교 교장은 학기말고사를 치르던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의 마지막 1교시 시험을 다음날로 미루고 학생들은 강당에 모았다. 여기에서 자유당 소속 민의원 홍병각이 정치 강연을 하려 하자 학생들이 “집어치워라”라고 외치며 강당에서 나와 시내 중심가를 향해 행진하면서 시위를 개시하였다. 이것이 1차 시위의 발단이 되었다.

학생들은 시위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면서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를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는 등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 운동에 항의하였다. 300여 명의 학생들은 성서동 민주당 충주시 당지부 앞을 지나 계속 행진하였으나 채 2㎞도 나아가지 못하고 경찰의 곤봉 세례를 받아 시위 대열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날 2차 시위를 감행하기로 하고, 시위 첫 집결지를 아예 시내 중심가로 잡았다. 이에 충주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이 충주시외버스터미널에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결과]

시위 대열이 중앙시장 앞에 이르렀을 때 다시 경찰의 기습을 받고 약 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서로 연행되어, 주모자로 알려진 네 명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석방되었다. 4·19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충주고등학교 학생들은 4월 27일 선무반을 조직하고 다음 날부터 시국 수습에 들어갔다.

선무반은 두 개 반으로 편성하여 군 특무대와 경찰서 차량 두 대를 빌리고 전파사에서 확성기 두 대를 빌려 노은·엄정 방면과 수안보·연풍 방면을 돌면서 시민 질서를 호소하는 내용의 방송을 하고 전단을 뿌렸다. 4월 24일에는 4·19혁명 때 희생된 학생과 시민 등을 위한 희생의연금 56,000환을 거리에서 모금하여 조선일보사에 기탁하였다.

[의의와 평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전국적인 저항 운동 중 3월 10일 충주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이다. 마산에서 일어났던 3·15 부정 선거에 항거한 시위 이전에 충주 지역에서 이미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저항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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