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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936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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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탑파,석탑,부도
분야 종교/불교,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엄기표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는 예배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불교 조형물.

[개설]

탑은 탑파(塔婆)·불탑(佛塔)·부도(浮圖)·솔도파(窣堵婆)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었다. 탑은 재료와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재료에 따라서는 목탑·전탑·석탑·모전석탑·청석탑·금동탑·동탑·유리탑·철탑 등 다양하다. 성격에 따라서는 불사리탑(佛舍利塔)·표식탑(標式塔)·비보탑(裨補塔)·묘탑[부도] 등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건립되었다.

사찰에서 탑을 건립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기능적인 측면으로 석탑이 예배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상징성과 생명성을 더하기 위하여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종교적인 측면으로 석탑을 세워 사찰 공간이 신성한 종교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의식이나 법회 시에는 예배와 공덕을 하기 위한 신앙적인 대상물로서의 측면이다.

우리나라는 목탑과 석탑이 대표적인데 그 중에서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는 석탑의 층수가 5층·9층 등 다층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3층·5층으로 층수가 감소되고, 전형적인 석탑이 출현하면서 층수도 3층으로 정형화된다. 고려시대가 되면 다시 석탑의 규모가 커지면서 층수도 3층을 기본으로 하여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석탑의 평면도 다양화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까지 계승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불교계가 위축되어 석탑이 많이 건립되지 못한다. 조선시대 석탑들은 규모가 축소되지만 층수는 높게 구성된다.

[삼국시대]

탑은 불교의 전래에 따른 사찰의 창건과 함께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탑은 그 재질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우리나라는 목탑과 석탑이 대표적이다. 이중에서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석탑은 삼국시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충주 지역에서 삼국시대 석탑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성행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주를 중심으로 많은 양의 석탑이 건립된다. 충주가 통일신라시대 중원경이 설치되면서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지만 통일신라 초기나 중기로 올라가는 석탑은 건립되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가 수도를 중심으로 서서히 발전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후 통일신라 말기 선종의 도입과 함께 지방으로 불교가 확산되고 지방에도 많은 사찰들이 건립된다. 이에 따라 수도가 아닌 지방에도 많은 양의 석탑이 세워지게 된다. 이와 같이 지방으로의 불교 문화 확산 과정에서 건립된 충주 지역의 대표적인 석탑이 중앙탑으로 불리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불교적인 성격과 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고려가 불교를 국시(國是)로 삼으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창건된다. 이에 따라 석탑과 석불의 조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현재 충주 지역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석탑들이 고려시대 건립된 것으로 이는 고려시대 충주 지역에서 불교가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의 석탑들은 초기에는 대형으로 건립되다가 점차 소형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고급 부재로 인식된 청석탑(靑石塔)이 많이 건립되는 경향을 보인다.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은 대표적인 대형탑이며, 사자빈신사지 석탑은 이형 양식으로 공예적인 요소가 다분한 장식적인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창룡사 다층청석탑은 정교한 치석과 장식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용관동 삼층석탑, 유학사지 삼층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 등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하여 건립된 석탑들이다.

단호사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온천리 석탑온천리 탑동 삼층석탑 등은 고려시대 들어와 소형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석탑이고, 원평리 삼층석탑추평리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치석과 결구 수법이 간략화되면서 고려화된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석탑들이다.

직동 오층석탑은 기단부의 안상과 상대갑석 상면에 마련된 연화받침대 등에서 고려적인 석탑 요소가 가장 잘 반영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은 정연한 치석 수법과 함께 1층 탑신석 아래에 별석(別石)을 삽입하여 고려시대 들어와 지역이나 장인에 따라 다양한 석탑 조영 기술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석탑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계의 위축과 함께 불사가 크게 감소하면서 석탑의 건립이 거의 없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왕이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사찰들만이 제한적으로 불사가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각 지역의 사찰이나 장인들에 의하여 규모가 작고 형식화된 석탑들이 일부 건립되기도 하고,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포된 석탑들도 건립된다.

현재 충주 지역에 남아있는 석탑 중에서 하구암리 석탑이 조선 후기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부재가 많이 결실된 상태이며, 치석과 결구 수법으로 보아 석탑만을 만드는 전문 장인에 의하여 건립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석탑의 건립이 크게 성행하지는 않지만 불심(佛心)이 높았던 사람들에 의하여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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