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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34
한자 民族固有-武術-世界武術-饗宴
영어의미역 Taekkyeon and World Martial Arts Festival
이칭/별칭 태껸,각희,비각술,탁견(托肩),덕건이,수박,수박희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경화

[개설]

고구려시대부터 시작된 택견은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로서 삼국을 통일하는 근간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호국 무예로서 무과 시제의 정규 과목이 될 정도로 국가 차원에서 장려했던 무예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으로 인해 쇠퇴하기에 이르렀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택견꾼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산에서 수련해 왔다.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던 택견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받게 된 것은 인간문화재 신한승(辛漢承)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오늘날 택견의 전승 교육을 위해 1997년 5월 31일 국가 지원으로 택견의 전승지인 충주에 택견전국총전수관이 건립되어 국민의 무예 수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1998년부터 택견의 전승 활성화를 목적으로 제1회 충주전통무술축제가 문화관광부의 공식 행사로 시작되었고, 2000년 제3회부터는 충주세계무술축제로 발전하여 택견의 세계화에 초석을 다졌다. 충주세계무술축제는 ‘오천년의 민족 혼과 세계 무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2008년 제11회 행사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세계 무술인들과 택견인들의 축제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택견]

1. 고구려의 선배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는 선배 제도가 고구려의 강성을 이룩했다고 주장하고 선배를 뽑는 경기 중에 수박(手搏)과 덕견이가 들어있었다고 했으며, 수박이 중국으로 들어가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무풍(武風)을 천시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수박과 덕견이를 다른 종목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조의 기록을 보아도 손으로 하는 기술과 발로 하는 기술이 구별되어 있음과 같다. 현재 쌈택견(결련택견)에서 볼 수 있는 동작은 이 둘을 합친 기예며 선배 제도에서도 실제 이 경기를 시범함에는 한 사람이 두 가지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두 가지 기술이란 손 기술인 수박과 발 기술인 덕견이를 말한다.

고구려는 국민의 기상이 씩씩하고 강인하였다. 북으로 수나라와 당나라, 남으로 신라와 백제의 괴롭힘을 당하면서 을지문덕연개소문 같은 명장을 낳았다. 외적의 침입을 견디자니 자연 무예에 힘썼을 것이요, 따라서 수박도 발전하였을 것이며, 이것이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어졌고 조선에 전해진 것이라 하겠다.

무예(武藝)는 역시 고구려가 본산임이 사실이다. 이러한 증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丸都城)에 있는 고분(古墳), 각저총(角抵塚), 삼실총(三室塚), 무용총(舞踊塚)등의 벽화가 오늘날 택견의 견주기나 본대뵈기와 흡사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몰라도 고구려 사람들이 상당한 수준의 무예(택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무용총 고분 벽화를 통하여 이미 고구려시대에 택견의 품이 어느 정도 완성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으며, 단순히 자기 몸을 방어하는 소극적 자세에서 일보 전진하여 공격의 투기로 변모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택견은 송대(宋代)에 발전된 중국 소림사(小林寺) 권법(拳法)보다도 수백 년 앞서서 상당히 발달된 형태로의 체계를 갖추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택견의 발달이 외적의 침입이 비교적 많이 있었던 고구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2. 백제의 수박(手搏)

백제는 왕을 비롯한 귀족층이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풍속이 백제에 그대로 전해진 것은 문헌을 통해 살피지 않더라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선배 제도의 수박도 백제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앞섰던 것으로 보이며, 계백(階伯)과 신충(信忠) 같은 장군의 출현을 생각하면 무예도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전라도 여산군(礪山郡) 작지(鵲旨)마을에서는 해마다 7월 15일 백중이 되면 근방 충청도와 전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手搏戱)로 승부를 겨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서 수박희가 행하여졌던 전통이 아닌가 한다. 수박희를 씨름으로 번역해 놓은 국역서(國譯書)가 있다. 이는 잘못임을 지적해둔다. 씨름은 각력·각저·각희 등으로 불렸다. 수박희는 고조선 때부터 우리 민족의 호신술로 자생되어 내려온 손 기술로서 고분의 벽화나 조각품 등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동작들로 지금의 쌈택견의 손 기술과 같은 형태라고 본다. 작지마을의 수박희는 백제 옛 땅에서 시행된 기예인 만큼 수박희가 백제시대에도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3. 신라의 화랑

신라는 국토가 넓어짐에 따라 인재를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 많이 모여 놀게 하고, 그 행실을 잘 관찰한 연후에 이를 천거하여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법을 쓰면 특별한 자기 나름의 호신술 내지 공격술이 생겨날 것은 분명하다. 화랑을 만들어 서로 연마하게 하여 이 중에서 인재를 뽑아 썼던 것이다. 『삼국사기』관창조에 “관창(官昌)[645~660]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로 의표가 단아하며 소년으로 화랑이 되었는데 사람을 잘 사귀고 나이 16세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므로 대감이 그를 태종(太宗)에게 추천하였다.”라는 기록은 신라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 그 기예를 보고 썼음을 증명한다. 유명한 화랑 관창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였기에 추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화랑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해 온 것이며, 종목도 고구려에서 시행하던 수박·격검(擊劍)·사예(射藝)·기마(騎馬)·덕견이·깨금질·씨름 등으로 각종 기예가 같았다고 했다. 이것은 고구려 제도가 신라에 그대로 유입된 경위를 밝히는 동시에 삼국의 무예가 서로 관련 있었던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주장이다. 또 고구려의 선배는 조백(皁帛)을 입어 조의(皁衣)라고 하듯이 신라의 선배는 꽃으로 치장을 하여 화장(花粧)·화랑(花郞)이라고 했다고 하니, 지나친 면도 적지 않지만 이를 도복의 시작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유·불·선 사상에 입각해 소년이 전장에서 죽으면 천당의 제1위에서 항상 소년으로 산다고 하여 용감한 정신을 고취했던 것이 신라의 화랑이었다. 단체심의 함양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정신이 있었기에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서는 상류 사회이건, 궁중이건 간에 택견이 정립되어 있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신라의 석굴암 입구에 부조된 나한상과 분황사의 탑 기단에 부조한 인왕입상(仁王立像), 그리고 절 입구에 서 있는 금강역사상 등에서 택견의 공격·방어 자세와 흡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수박]

수박희(手搏戱)라는 말은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보인다. 그간의 연구에 의하면 수박과 택견이 한 뿌리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였다. 당연히 명칭만 달리한 채 무예를 일컫는 일반 명사처럼 내려왔을 것이란 의견도 있으며, 과연 수박이 택견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수박·권법·무술·무예·무도는 동양 삼국의 모든 격투 기술을 일컫는 일반 명사이다.

따라서 수박은 한국 지역에 존재했던 격투 기술의 일반 명사이며, 그것이 시대를 거쳐 한때는 수박, 또 한때는 권법을 거쳐 무술, 무예 등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에는 중국·한국·일본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한자문화권이라는 특성에 의해 유추가 가능하다. 현재 일본에서 국기(國技)로 불리우는 ‘스모’는 한자로 상박(相搏)이라 쓴다.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수박과 상박을 혼용하여 사용한 경우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고려사』두경승전에 “두경승(杜景升)은 전주(全州) 만경현(萬頃縣) 사람으로 성격이 온후하고, 학문은 부족하나 용기와 힘이 있어 처음에 공학군(拱鶴軍)이 들었을 때 수박하는 이가 두경승을 불러 대오를 삼으니 그 외숙(外叔) 상장군(上將軍) 문유보(文儒寶)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수박은 천한 기예이다. 장사가 할 바 못된다.’고 하니 두경승이 드디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수박이 천한 기예로 되어 있다. 그러나 수박하는 이가 두경승을 제자로 삼으려 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수박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박을 천한 기예로 보았다는 기록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사』 정중부전에는 “다음날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려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모신 신하를 불러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거나하매 좌우를 둘러보고 말하기를 ‘장하다 이 땅이여, 군사 훈련을 할 만하다.’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하니 이는 대개 무신들이 실망함을 알고 인하여 후하게 대접함으로서 무신들을 위로하고자 함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수박을 천한 것으로 보기는커녕 임금 앞에서 지금의 단체 대련과 같은 시범을 보인 당당한 무술이었음이 역력하다.

또한 수박은 왕과 신하들이 관전하는 가운데 경기를 행했음이 분명하다. 수박의 기술이 상당히 발전하고 경기로서 체계가 잡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 기록에서 무인이나 문인이나 무술에 대한 소양이 상당히 갖추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수박은 임금이 무인의 재주를 구경할 때도 시행한 무인들의 중요한 기예 중 하나였다. 충혜왕은 여러 차례 각저희와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수박희를 행한 곳이 주로 궁외(宮外)로 되어 있다. 이는 수박을 유희 내지는 무예화시켜 넓은 공간에서 시행했다는 증거라고 본다. 근래까지도 수박과 함께 무술로서 어깨를 나란히 한 택견을 야외에서 시연하는 것을 보면 시행 장소의 전통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의민(李義旼)정중부(鄭仲夫)를 도와서 난을 성공시킨 핵심 인물 중 하나이다. 이의민 또한 수박을 잘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의종(毅宗)이의민이 수박을 잘하여 장군(將軍)으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고려시대에 수박을 잘하여 출세한 인물의 실상을 볼 수 있다. 12세기 말만 해도 수박을 잘하면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수박의 기술도 발달되고 체계가 잡혔으며 뭇사람이 그 기술을 선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의민의종을 시해할 때의 기록을 보면 이의민의 수박 기술이 대단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의민의종을 시해하기 위해 수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에는 의종이의민이 만지는 대로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절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급소를 처치하는 기술이 이미 상당히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통하여 고려시대에 수박이 매우 발달되고 널리 퍼져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박 기술이 뛰어나 벼슬도 얻고 지위도 높아졌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발 기술을 주로 하는 택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손 기술을 위주로 한 수박에 대한 기록만 다수 보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상고사』와 같은 근대의 역사책을 보면 택견에 대한 연원을 고조선으로 잡고 있다.

수박이 손 기술을 주로 한다지만 발의 동작도 따라서 일정한 형태로 수박에 맞게 발달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다만 손 기술이 더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을 뿐이지 발 기술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근대의 택견이 주로 발 기술을 위주로 삼는 것을 보면 손 기술을 위주로 하는 수박에서 점차 발 기술을 위주로 하는 택견으로 변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손 기술의 섬세성보다는 발 기술의 힘참과 일격에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술이 더 부각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택견]

조선시대에는 수박이 제도적으로 병사(兵士)를 뽑는 정식 종목이었다. “병조(兵曹)와 의흥부(義興府)에서 수박희로써 사람을 시험하여 방패군(防牌軍)을 보충하는 데 3인을 이긴 사람을 뽑아 썼다.” “갑사(甲士)를 선발하였다.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의흥부와 병조에서 흥인문(興仁門) 안에 무사를 모아 놓고 말타고 활쏘기와 걸으면서 활쏘기를 시켜서 갑사(甲士)에 보충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를 할 수 없는 자들을 삼군부(三軍府)에 모이게 하여 달리기와 수박을 시켜서 3인 이상 이긴 자를 모두 뽑아서 썼고 그것도 못하는 자는 버렸다.”는 『태종실록(太宗實錄)』 기록을 통해 보면 수박이 군사를 뽑는 정규 시험 종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박은 무사의 가장 기본적인 무술이었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던 것이다.

1846년 유숙(劉淑)이 그린 「대쾌도(大快圖)」에는 씨름과 택견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명절날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씨름과 택견이 동시에 벌어지는 판을 묘사하고 있다. 씨름과 택견하는 장면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점으로 보아 택견이 하나의 민속놀이이자 생활 무예로 간주되는 증거일 수 있는 그림이다. 이 민속화는 현대에 이르러 택견의 모습을 추정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안확(安廓)은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에서 수박희를 지금의 택견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는 고려시대에 주로 손 기술에 의존하던 수박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발 기술에 중점을 둔 탁견으로 발전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손 기술과 발 기술의 중요성이 거의 비슷하게 발달된 현상을 두고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에 지어진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탁견희(托肩戲)와 수벽타(手癖打)를 분리하여 한시(漢詩)로 그 동작을 읊은 것이 전한다. 탁견(托肩)은 각술(脚術)이고 수벽타(手癖打)는 수박(手搏) 곧 수술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해동죽지』의 이러한 설명으로 인해 현재 택견을 두 갈래의 형태로 보는 이도 있다. 발 기술을 위주로 하는 택견과 손 기술을 위주로 하는 수벽치기로 본다. 그러나 택견이 손기술과 발기술을 중심으로 걸어 메치는 기술로 승부를 내는 대걸이와 발질과 걸이기술을 함께 사용하여 승부를 내는 맞서기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수박은 택견의 일부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해동죽지』 속악유희편에는 여산군조에는 택견·탁견희(托肩戲)에 대해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대하여 서서 서로 차서 거꾸러뜨린다. 세 가지 법이 있는데 최하자는 다리 삭제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이 있는 자는 상투에 떨어진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도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내기하여 빼앗는다. 법과 관(官)에서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장난이 없다. 이것을 탁견(托肩)이라고 한다.”는 기록과 “백 가지 기술 신통한 비각술(飛脚術), 가볍게 비녀와 상투를 스쳐 지난다. 꽃(애인) 때문에 싸우는 것도 풍류의 성격, 한번 초선을 빼앗으면 의기가 양양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날렵한 다리의 재주가 세 가지로 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택견의 최고 기술은 비각술(飛脚術)인 것 같다. 누가 높이 찰 수 있으며 정확히 가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이다. 경기의 규칙과 승패의 기준이 분명한 종목인 것이다. 이는 현대의 여러 무술과 견주어 기술면으로나 경기 운영의 합리적인 면으로나 손색이 없다.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승자에게 내리는 보상 정도의 상징적인 말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모든 스포츠에는 승패가 있어야 흥미로우며 승자에게는 보상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탁견(托肩)은 이렇게 경쟁적이고 스포츠적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기술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해동운기(海東韻記)』에는 수벽치기·수벽타(手癖打)에 대해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는데 예전에 칼 쓰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인데 두 손이 왔다갔다 할 때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에 어기면 곧 타도(打倒)를 당한다. 이것을 수벽치기라고도 한다.”라는 기록과, “검술(劍術)은 먼저 재주의 묘(妙)로부터 척장군(戚將軍)이 벌써 병사(兵士)에게 가르쳤네. 삼절구(三節朐)에 만약 한 절만 어긋나도 주먹이 머리에 떨어지기는 눈깜짝이라.”라는 기록이 있다.

수벽(手擗)은 검술의 기본이기도 하다.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수술(手術)을 병사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은 척계광의 저서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練兵實記)』를 두고 한 말이다. ‘삼절구(三節朐)’는 팔로써 서로 맞서서 겨루는 동작을 말한다. 굼실굼실하며 두 손이 왔다 갔다 할 때에 한 손이라도 법을 어기면 곧 날카로운 공격을 머리에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수벽치기라고도 한다.

현재 택견이라고 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의 발 기술이 중심인 기예를 말하는 것이며 손은 따라서 활개짓을 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쌈택견(결련)에 이르면 손 기술도 상당히 중시되고 있다. 앞으로는 손 기술과 발 기술을 종합하여 보다 발달된 종합 무술로의 개발이 필요하다. 택견의 경쟁적 요소처럼 무예적 기능과 스포츠적 기능이 양립하는 무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재물보(才物譜)』는 1798년(정조 22) 이만영(李晩永)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 사전이다. 여기에는 “한 무제 때에 시작되었는데 소가 뿔로 힘을 다투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수박은 변이요, 각력은 곧 무이다,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같은 것으로 지금의 슈벽은 마땅히 이 글자를 쓴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같이 일부 문헌에서는 택견과 수박을 같은 무예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 송덕기(宋德基)의 증언에 의하면, 택견을 1911년 사직공원 뒤 감투바위에서 스승 임호(林虎)에게 배웠다고 한다. 송덕기는 1912년 윗대패와 아랫대패의 택견꾼이 시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증언했다. 여기에서 윗대패, 아랫대패라고 한 것은 유파가 아니고 지역적으로 불려진 통칭이다. 어느 지역과 겨루느냐에 따라 위대, 아래대로 나누어 부른 것이다. 이는 서울에서 전승되던 실상이며, 각 지방에서도 면면히 전해 왔을 것이다. 이 두 대패의 실력은 서로 비슷했고 이들은 단오와 추석 때 주로 모여 택견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고유 민속 행사와 더불어 택견은 없어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택견의 계보와 전승]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우리 고유의 것은 모조리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고유의 민속놀이는 민족 말살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택견도 사라져 가는 민족 문화 중의 하나였다. 택견을 금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경찰은 택견꾼을 보이는 대로 잡아갔다. 송덕기는 택견 시합을 일제강점기부터 못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택견은 소수의 택견꾼들에 의해 비밀리에 전승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방된 후 전통 문화를 찾고 기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특히 1970년대에 이르러 대학에서 일어난 민족 문화 확산 운동에 힘입어 택견도 마찬가지로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택견이 고대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하나 조선 말엽인 19세기 중반부터 택견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임호(林虎)[1882~?], 송덕기(宋德基)[1893~1987], 박털백[1845~?], 신재영(辛在榮)[1882~1948], 강태진[1884~?], 박무경[1882~?], 김홍식(金弘植)[1892~1984], 전진영[1861~?], 이경천[1904~1985] 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지금 전하는 택견의 계보는 신한승(辛漢承)[1928~1987]이 큰 역할을 했으며 현대 택견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19세기 중엽 왕십리 박털백에게서 배운 신재영은 신한승의 종조부(從祖父)이다. 신한승은 어려서 신재영에게 택견을 전수받았고, 김홍식에게도 배웠다. 김홍식은 박무경에게 배웠고, 박무경은 박털백보다 10년 아래이며 을지로 입구에서 살았다. 박무경보다 6년 아래인 전진영은 왕십리 사근동에 살았다. 이경천(李敬天)은 전진영의 제자이다. 신한승은 이경천의 택견 기술도 습득한 바 있다.

박털백의 제자 신재영과 동년배인 임호의 제자는 송덕기이다. 신한승송덕기의 택견을 모두 물려받았다. 말하자면 신한승은 명실공히 각 계보를 망라한 택견의 재정립의 큰 역할을 수행한 현대 택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신한승은 전수받은 택견을 체계화하고 정리하여 1983년 6월 1일 택견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하였다. 이때 송덕기신한승이 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송덕기신한승의 계보를 이은 정경화(1954년생)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국가 전수생과 이수자, 조교, 예능 보유자 후보를 거쳐 1995년 6월 1일 두 보유자에 이어 2대 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택견의 특징]

택견은 다른 무술에 비해 질박하며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몸놀림으로 공방(攻防)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택견은 중국의 권법처럼 동작이 길게 흐르지도 않고, 순간적으로 우쭐거려 튕기는 탄력에 중점을 두고 있고, ‘칼잽이’라 하여 손바닥이나 손아귀로 미는 것이 있으며, 주로 발을 많이 사용하므로 발로 하는 기술이라 해서 오래된 우리말 사전에는 택견을 각희(脚戱)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무술이나 무희가 사람의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술의 체기(體技: 몸 기술)가 주위 무술이나 무희의 영향을 받아 동작의 겉모양은 조금씩 변해도 동작 속에 있는 기본 몸짓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택견은 고유의 기본적인 부드러운 곡선의 몸짓을 이어온 전통 무술로 날카롭고 세련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리가 없고 모든 몸놀림이 손발과 근육의 움직임이 일치하여 자연스럽게 공방할 수 있는 무술인 것이다.

택견은 품밟기·활개짓·발질의 독특한 몸놀림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중심을 흐트러 놓아 공격의 기세를 둔화시킬 수 있고 몸을 굼실댐으로써 충격을 완화시켜 자기의 몸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스포츠로서의 이점을 고루 갖추고 있어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훌륭한 전통 무술이라 하겠다.

[택견의 구성 요소]

택견은 품밟기·활개짓·발질의 모양새 형태로 짜여져 있으며 전래의 민간 유희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택견도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아 상세하게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혼자익히기(기본 연습), 마주메기기(상대 연습), 견주기(맞서기·대걸이) 등의 3단계 순서가 있다.

혼자익히기는 품밟기·활개짓·발질을 혼자서 멋대로 익히는 것이며, 마주메기기는 택견의 기본적인 기술을 둘이 마주서서 반 약속 하에 마주차고 마주걸이를 하며 익히는 과정이며, 견주기는 택견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한 응용 기술로서 걸이 50%, 차기 50%의 비율로 겨루는 것을 말한다. 이밖에도 유동자에 한하여 할 수 있는 경기 규칙을 벗어난 결련택견이 있다.

택견은 크게 서기택견과 결련택견으로 나눌 수 있다. 서기택견이란 활수, 즉 방어 위주의 택견으로서 앞서 기술한 3단계를 거쳐 일정한 경기 규칙의 적용을 받아 맞서기를 하는 것을 말한다. 결련택견이란 활수보다는 살수, 즉 공격 위주의 택견으로서 일정한 적용을 받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겨루는 문자 그대로 쌈택견을 말한다. 현재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서기택견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련택견은 12가지만 기록되어 있다.

품밟기란 택견의 기본적인 발놀림으로서 택견의 몸짓을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보법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택견의 품밟기는 우리의 전형적인 가락 중에서도 굼실굼실하는 균형이 깨진 듯한 3박자로 되어 있다. 활개짓에는 활갯짓긁기·제치기·헤치기·활개짓치들기·활개짓돌리기 등 5가지 형태가 있으며, 택견의 공격과 방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손놀림을 말한다. 공격의 모체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발질에는 걷어차기·째차기·후려차기·내차기·곧은발질·는질러차기가 있으며, 모두 곡선적인 발질을 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특히 택견은 기본기만 잘 수련하면 몸의 어느 방향에서도 응용기를 구사할 수 있는 운동이다.

택견에는 모든 동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본때뵈기가 있다. 그러나 원래 택견에서는 일정한 형(型)이라는 것은 없고 기술 구조가 맞서기 위주로 되어 있으며, 형(型)과 비슷한 것이라면 ‘본때’라는 것이 있지만 틀에 박힌 실전의 표본이 되는 공격과 방어의 수가 아니고 품을 밟으며 활개짓을 하면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수를 멋있게 보여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본때는 마당을 돌며 한마당째다, 두마당째다 하며 열두마당까지만 돌며 본때를 보인다.

일정한 공격과 방어의 모양새를 갖춘 태권도의 품새처럼 택견에서도 현대에 이르러 신한승이 일정한 동작으로 정립한 본때뵈기는 ‘붓뵈기’로서 택견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음(陰)과 지(地)에 해당하는 앞의거리 여덟마당과 뒤의거리 네마당으로 짜여져 있으며 양(陽)과 천(天)에 해당하는 결련택견으로 이루어진 별걸이 여덟마당과 결련걸이 네마당이 있다. 또한 택견의 위계 표시로는 보통 다른 무술에서 사용되는 ‘급’이나 ‘단’ 대신 ‘째’나 ‘동’을 사용하고 있어 용어상으로도 전통적인 맛을 풍기고 있다.

끝으로 견주기(맞서기)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설명하자면, 옛날 택견의 맞서기는 아랫대와 윗대로 나누어 동리 간 시합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아랫대와 윗대는 택견 기법상의 차이가 아니고 편을 갈라 싸울 때 지역적으로 나누어 불려진 명칭이었을 것이란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는 궁궐을 기준으로 해서 편을 갈랐다 한다. 왕십리와 종로 패가 싸울 때에는 종로가 윗대가 되고 왕십리가 아랫대가 되었다 한다. 또한 같은 성안에서는 궁궐 가까운 쪽이 윗대가 되었다 하니 어느 동네와 견주냐에 따라 윗대도 될 수 있고 아랫대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택견의 현황]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택견은 국가 전수생이 100여 명과 국가 이수자 30여 명 그리고 전수 교육 조교 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월 보유자로부터 전수교육을 지도받아 활동 중이다. 또한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그 문하생들에게 학력 인정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전수생들의 문화재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시키고 평생 교육의 일환으로 2003년 3월부터 학력 인정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문하생 학력 인정이란 현행 학점은행제와 국가무형문화재 전수 교육을 연계하여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교육개발원으로부터 평가, 인정된 국가무형문화재 전수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학습자에게 학점을 인정해주는 평생 교육 제도이다.

현재 택견 관련 단체로는 전국의 택견 국가 이수자 및 국가 전수생으로 구성된 택견국가전수회가 조직되어 전수 교육 및 전수생 선정 등 택견의 전승·보급을 위해 정진하고 있으며, 사단 법인으로는 택견원형보존협회와 한국전통택견협회가 활동 중이다. 택견 시설로는 충주의 택견전국총전수관이 1997년 5월 31일 국고의 지원을 받아 명실공히 국민의 무예 수련장으로 건립되었다. 택견전국총전수관은 2천여 평의 대지 위에 연 건평 291평의 규모로 한옥 구조의 전수관으로 수련장·회의실·사무실·자료실 등이 비치되어 있다. 그외에 사설 전수관이 각 지역별로 분포되어 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택견 시범을 보이면서 택견은 국민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국민의 스포츠 혹은 레저 및 여가 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증대하여, 스포츠에 대한 요구가 관람 스포츠 및 참여 스포츠 형태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택견과 같이 직접 참여하여 전통 무예에 동참하게 되는 계층이 확대되었다. 택견은 남녀노소에게 체력 단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심리적 긴장감을 해소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전통 무예이다.

[5천년 민족혼과 세계무술의 만남]

1. 세계 무술의 향연, 충주세계무술축제

충주는 1983년 6월 1일 택견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면서 무술의 고장, 택견의 메카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택견의 원형 보존과 전승 교육을 위한 택견전국총전수관이 1997년 5월 31일 개관하자 충주는 명실상부하게 한국 무술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무술의 전당인 택견전국총전수관이 건립된 후 택견을 중심으로 한 각종 무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무술 축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문화관광부의 지역 축제 행사로 승인을 받아 1998년 5월 28일 국내 12개 무술단체가 참가하는 제1회 충주(수안보)무술축제를 시작하였고, 2000년 이후 제3회부터는 세계 각국의 전통 무술 단체를 초청하여 충주세계무술축제로 명칭을 변경하여 ‘5천년 민족 혼과 세계 무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총 208개 국 373개 무술 단체와 478만 명의 관광객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로 발전하였다.

제10회 축제는 ‘21세기 충주, 세계적인 무술 도시 위상 강화’라는 주제로 2007년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충주시 칠금동 칠금관광지 일원에서 열렸으며 국내 무술 단체 10단체와 외국 19개국에서 16단체가 참가하였다. 총 예산은 15억 원 정도였고, 충주시에서 주최하고 재단 법인 중원문화관광재단에서 주관하였다.

2. 충주세계무술축제의 발전 방향

충주는 충주세계무술축제를 통해 충주의 브랜드 제고 및 무술의 메카로 발전시켜 국내외 전통 무술을 관광 상품화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무술의 저변 확대로 국민 건강 증진을 도모하며, 중원 문화의 계승 발전 및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을 조성하고자 하고 있다. 특히 충주세계무술축제를 세계무술올림픽으로 발전시켜 세계인들과 함께 무술 문화를 공유하여 인류 평화에 기여하며 제11회째 맞는 2008년의 충주세계무술축제는 택견의 세계화와 더불어 세계무술연맹을 유네스코 산하 무형유산 정부간 위원회 자문 기구로 승인받는데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충주세계무술축제는 지방자치단체가 독자적으로 주최하는 무술 이벤트로써 일종의 스포츠 행사이다. 이 행사를 통해 충주 지역의 이미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 간접 자본 형성 및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충주시의 지방 재정 자립을 위한 기업의 스폰서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하며, 충주 지역과 연계한 체험 관광 패키지 및 관광 상품을 개발해야 하며 충주세계무술축제를 세계에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다양한 홍보 전략을 모색하여야 한다. 또한 충주세계무술축제의 모태가 된 택견을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과 택견의 세계화에 중점을 두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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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세계무술축제 연도별 개최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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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세계무술축제 참가단체 현황

[의의와 평가]

택견은 무술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전래의 전통 무예이며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이처럼 소중하고 훌륭한 문화유산인 택견을 전승·발전하고 세계화시키기 위해 매년 충주에서는 충주세계무술축제가 국내 무술 단체와 해외 무술 단체 40여 단체가 출연하여 각 무술의 특성과 우수함을 시연하고 있다. 하지만 택견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할 수 있으며 향후 택견의 비중을 높여가야 하겠다.

그나마 충주세계무술축제를 통해 택견은 여러 모로 홍보가 되지만 국내 유일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원이나 육성 정책이 미미한 실정이다. 무형문화재는 사람이 몸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한 번 왜곡되면 다시 복원이 불가능하다. 오늘날 택견은 국가무형문화재이면서도 무분별한 사단 법인의 단체 난립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다. 한 문화재 분야에서의 인간문화재란 그 시대의 대표성과 기준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문화재의 주인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질 때만이 무형문화재의 원형 보존이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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