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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A010204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구

미륵리사지를 돌아보면 사지와 구분지어 야트막한 담장을 두른 곳을 볼 수 있다. 정원석 몇 개를 배치한 평탄한 정원을 연상시킨다. 미륵대원 터이다.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에 사원을 설치하여 불교의 이상세계를 널리 확산시켜 민중의 평안을 꾀하는 한편 유사시에는 사원 세력을 동원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전략을 써왔다. 자연스럽게 사찰 내에 보급을 위한 병참기지도 설치되었다. 또한 원(院)은 역과 함께 고려시대부터 많이 설치되었고 정부에서는 원위전(院位田)이라는 전토를 각 원에게 지급하여 운영토록 하였다. 고려시대 원의 특징 중 하나는 불교계에서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직접 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미륵리사지이다.

이곳의 발굴 조사는 1970년대부터 5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주로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안말에서 미륵대원 터로 이주하여 살던 주민 이한탁 씨가 집 앞의 마당을 파던 중 유구를 발견하고 이를 신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륵대원 터에 살던 안말 마을사람들을 점말로 이주하게 되었고, 점말에 한옥마을이 형성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고려시대의 역원지 건물이 발견됨으로써 이를 미륵원이라 하였다. 이곳은 하늘재 너머 문경에 운영되었던 관음원보다 규모가 컸기에 미륵대원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미륵대원계립령동령야(彌勒大院鷄立嶺東嶺也)” 라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곳은 계립령(하늘재) 길과 연계되어 고려 초기 에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부터 조령, 즉 문경새재에 관방시설이 완비되면서 이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륵리사지의 석굴사원이 언제부터 경영되었는지는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으로 기록되었으니 일연선사의 생존 시에는 이 석굴사원의 사명(寺名)이 ‘미륵대원’이었으며 이때까지 법등이 이어져 내려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륵대원이 쇠퇴하게 된 원인을 생각해본다면, 조선 초기 영남과 기호를 연결하는 통로가 조령으로 바뀜에 따라 당연히 하늘재 밑에 위치한 미륵대원은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석굴사원의 쇠락에 따라 원의 기능도 쇠퇴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면 사원의 쇠퇴 원인을 함께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원의 폐사 시기도 정확한 기록이 없기에 정확히 알기 어렵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40년(1253) 9월에 충주의 최수가 금당협에서 몽고군 15급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 42년(1255) 10월에는 몽고병이 대원령, 즉 하늘재를 넘으니 충주에서 정예 군사를 내어 몽고군 1000여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동왕 43년(1256) 5월에도 충주성월악산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 보이는 ‘금당협’, ‘월악산신사(月嶽山神祠)’의 위치가 모두 현 미륵리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사지 주변의 병참터 축대와 말무덤 등의 관련 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미륵리사지의 쇠락이 곧 미륵대원의 쇠락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발행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충청도에는 212개의 원이 있고 충주목에는 13개의 원이 있는데 미륵원도 그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원의 기능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륵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대원의 건물지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통해서 미륵대원은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고 건물지는 ‘회(回)’자형 구조로 가운데에는 말을 묶어 둔 마방(馬房) 시설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주변의 건물 터는 여행객 숙소 및 관리인이 기거하였던 구조로 이해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이 난무했을 건물 터는 몇 개의 큰 돌덩이로 그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건들을 전부 땅 속에 감추고 미륵대원 터 위로는 햇빛이 내려앉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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