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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을 피해 자리 잡은 이덕량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10104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풍덕마을에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한다. 그러던 중 15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인대군의 후손인 이덕량(李德樑)이 난을 피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덕량[1576~1651]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 이름은 덕명이었다. 어릴 때 현덕으로 바꿨다가 다시 덕량으로 바꾸었다. 괴산군 감물면 주월리 도락골에 자리 잡은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9세손이다. 그는 도락골에서 조금 떨어진 대상동에서 태어났으며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아버지를 모시고 6살의 어린 동생 이덕전(李德栓)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난중에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함께 여의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 헤매다가 충주의 서쪽으로 피난을 해 처음 주덕면 덕련리 덕련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

덕련리에는 농토가 많지 않아 제내리 앞의 진개로 옮겨 살았으나 홍수로 인해 앞개울인 요도천이 범람하면서 살기가 어려워지자 이덕량은 방죽안의 지세를 답사하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가는 폐허가 되고 다래와 칡넝쿨이 뒤덮여 있었는데, 이것을 말끔히 치우고 들어와 살게 되었으니 풍덕마을 개척의 첫발이었다. 그는 덕스러운 성품에 너그럽고 온화하며 예학이 높고 밝은 사람이었다. 초계정씨 장사랑 정덕린(鄭德麟)의 딸을 맞아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정지(李廷芝), 이정명(李廷蓂), 이정협(李廷莢)이 그들이다. 아이들이 장성하자 출가시켜 장남 이정지는 성동(聖洞)에, 차남 이정명은 대촌(大村)[큰말]에, 막내인 이정협은 자기와 함께 풍덕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이로써 삼형제가 서로 이웃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풍덕성동·대촌마을 일대를 개척하고 확고한 생활기반을 닦으면서 진안대군파의 세거지로 만들 수 있었으니 오늘날 방죽안 즉 제내리가 바로 이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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