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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의 설치와 가정문화의 변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502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1956년까지만 해도 풍덕마을에는 라디오가 한 집도 없었다. 유성기가 2대, 신문 구독자가 겨우 세 집 뿐으로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면사무소나 조합의 회의에 참석하고 온 대표가 소식을 전하려면 동산에 올라가서 회의하러 오라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해야만 했다. 이러한 전달 방법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행정적 전달 사항은 물론 날로 변하는 새로운 영농기법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어려움을 두고 마을 총회에서 확성기의 설치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릿고개와 철궁기를 맞게 되면서 반대하는 노인층이 많아져 무산되었다.

그러나 선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이세영 구장이 농업은행에서 20만환을 차입하여 1956년 8월 6일 청주에 가서 스피커시설을 구입하여 공회당 앞 미루나무 위에 높이 달고 방송을 시작하였다. 당국의 전달 사항도 자세히 전함은 물론, 아침·저녁으로 신문의 소식도 전하고, 라디오도 들려주며, 유성기를 빌려다가 노래도 틀어주는 등 여러 모로 활용하니 마을의 표정도 매우 밝아지게 되었다 한다.

또한 농림부와 농업은행 중앙본부 관계관까지 찾아와서 마이크로 주민에게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칭찬했다. 선거철에는 출마자에게, 마을에서 소인극을 할 때에는 세를 놓기도 하였다. 시계가 없었던 당시에 때마다 시간을 알리기도 하고 간혹 노름하는 집이 있으면 아무개네 집에서 노름을 한다고 알리기도 하여 놀음을 방지하는데도 한몫을 하니 그 필요성이 더욱 높아져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던 시절이라 충전을 하기 위해 주덕에서 충주로 축전기를 들고 쫓아다니는 일은 정말 힘에 겹고 피로에 지칠 정도였다고 당시 구장을 역임하였던 이세영 씨는 회상한다. 그러나 그가 농촌 계몽의 선봉에서 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농촌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선발되어 KBS 중앙방송국에서 취재하여 1960년 7월에 라디오로 20분이나 풍덕마을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은행에서 차입한 방송장비 대금은 방풍림계에서 지불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쉽게 해결되었으며 1957년 11월 5일에 쌀 2가마를 지급하였다.

이후 확성기를 통해 새로운 소식을 듣고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면서 가정에서도 문화적인 생활향상을 위한 노력이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에서 1965년까지의 변화를 보면, 신문구독 가정이 8호에서 11호로, 잡지가 5호에서 6호, 라디오가 마을 공동으로 1대이던 것이 5가정에 보급되었으며, 재봉틀이 6대에서 17대, 자전거가 2대에서 9대, 축음기가 2대로 유지되고, 시계는 전무상태에서 121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제 이런 종류는 문화를 가늠을 보는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으니, 2008년도 현재에는 신문 8호, 전화 62대, 휴대폰 69대, TV 89대, 컴퓨터 26대, 트럭 17대, 승용차 13대이며, 연막소독기 6대를 보유한 문화마을로 변화되었다.

[정보제공]

  • •  이세영(남, 82세, 향토연구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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