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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6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우리나라에서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언제 어디에서나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제내리에서도 마을 공동으로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열성이 일찍부터 있었다. 서당 교육으로부터 강당계를 조직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사립학교를 운영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문맹자를 없애겠다는 젊은이들의 열기가 가난한 농촌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선각자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교육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열정이 초등학교를 이 마을로 유치하게 하였으며, 농번기의 바쁜 일손에 어린이들을 위한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마침내 이 작은 농촌마을에 유아원을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정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 그 모범이 되었던 사례가 방풍림계에서 운영했던 장학사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방풍림계에서는 1937년 11월 5일 마을의 원로들을 초청하여 경로효친사상을 앙양 고취하고자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비용으로 8원 60전을 지출하였는데, 이날 계원들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비의 일부라도 보조하고자 학자금을 매년 지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첫해 공·사립의 소학교 학생 35명에게 153원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신입계원에게는 만 5년이 경과한 후에야 학자금을 지급하기로 하는 규약을 정하기도 하였다. 첫해 학자금을 지급 받은 학생들은 사립학교(마을 공회당에서 배우는 학생을 말함) 22명(남학생 이광호 외 14명, 여학생 이승영 외 6명), 공립학교(대소원 소학교, 용원 소학교)에 다니는 13명(남학생 이동호 외 8명, 여학생 이양호 외 3명) 이었다.

이러한 장학 사업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938년 11월 5일에 36명의 계원 자녀에게 학자금 244원 86전을 지급하였다. 이날은 공동 우물 6개소에 대한 보수비로 210원, 풍덕 구장 이팔영의 일본 농업상황 시찰 경비로 25원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1939년 10월 25일에 36명의 학생들에게 216원, 1940년 11월 5일에 23명의 학생들에게 115원. 1941년 10월 18일에 23명에게 161원., 1942년 10월 18일 32명의 학생들에게 벼 1,600근., 1943년 10월 29일 31명의 학생들에게 171원의 학자금을 지급한 것을 끝으로 이 사업은 부득이 중단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 말기 전쟁 물자에 시달리던 일제가 농산물의 강제 공출과 천인저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모두 긁어 갔으므로 국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곤궁해졌으며, 방품림계의 자금도 농산물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장학사업의 뜻을 갖고 여러 차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루질 못하였다. 1967년 3월 한국 농업상 단체상을 탔을 때 대통령 하사금 10만원을 장학기금으로 적립하고, 독지가의 협찬을 받아 100만원까지 기금을 조성하고자 장학회 운영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을의 오래된 빚이 있어서 그 기금을 전용한 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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