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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705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제내리에는 마을에 다음과 같은 풍덕전거(豊德奠居)가 전해지고 있다. 마을 개척자인 이덕량이 방죽안을 개척하여 성동·대촌·풍덕의 세 마을에 터를 닦아 세 아들에게 각기 나누어 장남은 성동에, 차남은 대촌에, 그리고 막내는 자신이 자리 잡은 풍덕에 살게 하였다.

그런데 이덕량은 막내를 제일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가장 좋은 터를 잡아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풍수가에게 물은 즉, 풍덕이 3백년 발복지지(發福之地)라 하므로 막내의 터로 정하여 주었다. 그리고 막내가 죽거든 자기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막내인 이정협의 무덤이 이덕량의 산소인 사락리 산 60의 엄동 황금산 아래에 위 아래로 차례대로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큰말에는 약 5백년 정도가 되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마을에 김첨지가 살았는데 나이 40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에 아들 낳기를 빌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였다.

김첨지 내외는 정성어린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2년여가 넘도록 느티나무에 치성을 드렸다. 과연 아내가 임신을 하여 마침내 1906년에 아들을 낳게 되었다. 김첨지 내외의 기쁨은 이룰 말할 수 없었으며, 마을에서도 주민 모두가 축하하였다. 김첨지 내외는 의논하여 아들의 이름을 느티나무의 영험으로 얻었다고 하여 ‘느티’라고 지었으며, 느티의 어머니는 느티나무에 금줄을 매고 해마다 고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어서 둘째 아들을 또 얻게 되자. 이번에는 느티나무의 복록을 받았다는 뜻으로 ‘늣복’이라고 이름 지었다.

지금에도 김첨지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느티나무는 고목이 되어 죽어가던 것을 마을에서 잘 보호하여 지금은 무성하게 소생하고 있다. 아들 없는 이들이 소원을 비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성동마을 한복판에는 약샘이 있었다. 속병(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서 인근의 마을은 물론, 멀리 충주와 음성 지역의 사람들도 찾아오고 꽃가마를 타고 오는 귀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약 150여 년 전에 이 약샘 윗동산에 묘를 쓴 이후로는 약효가 떨어져서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샘으로 바뀌었다.

또한 약샘 위에 있는 산소에 망주석과 동자석을 세우자, 성동마을에 홀아비와 과부가 많이 난다고 하여 누군가가 몰래 쓰러뜨리면 묘주는 또 세우고 하기를 여러 번 거듭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39년에 큰 가뭄이 들어 인근의 우물이 모두 말랐으나 이 약샘 물만은 여전이 나와서 인근의 마을 사람들이 이 물로 연명을 한 적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약샘은 동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동샘이라고 하며, 성동마을의 식수원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지하수를 개발하여 사용하게 되면서, 이 우물은 옛날 타래 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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