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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101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목계는 본래 충주군 엄정면 지역으로 산계동(山溪洞) 또는 목계리로 불렀다. 산계동의 산(山)은 ‘뫼’ 혹은 ‘모이’로 불리다가 ‘목’으로 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 뒷산인 갈산이 ‘갈매기’로 부르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와 같은 목계리의 지역 구성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전통적으로 목계를 구성하던 여러 자연 마을들이 동계(東溪), 서계(西溪), 내계(內溪)로 구분되었고 이를 합하여 목계리가 되었다.

목계가 나루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주목의 7진도(津渡) 중 하나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루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계는 충주 중심지와 근접해 있고 강 건너편에는 조선 전기 세곡(稅穀)을 실어 나르던 조운(漕運)의 중심지인 가흥창(可興倉)이 있었으며, 원주와 제천을 연결하는 육로가 있었다는 목계의 지리적 이점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조선 후기 세곡 운반이 사선(私船)으로 대체되면서 남한강의 수운 체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사선은 그 동안 소작료의 운송과 소규모의 물물교환 정도를 담당하였는데, 세곡의 운반에 뛰어듦으로써 사선업자들은 드디어 남한강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지방선인(地方船人)들은 17세기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18세기경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상품유통의 증대와 맞물리면서 남한강 수운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5대 갯벌장의 하나였던 목계에는 충주 전역을 비롯하여 제천, 원주, 음성, 괴산 그리고 경상도 북부 지역의 상인까지 모여들었던 상업포구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새우젓배, 그 밖의 상고배(장사치)가 올라와 이 포구에서 짐을 풀면 충주와 제천, 원주, 영월, 문경 등지에서 쌀이며 콩, 담배 등 내륙지역의 산물들이 달구지나 소에 실려와 바꿈질을 하던 것이 큰 장이 되자, 관에서도 난장을 허용하여 도가(都家, 도매상)를 통해 물건을 사고팔게 했으며, 곡식바리를 감독하는 말감고(-監考)를 두어 장을 관리하게 하였다. 갯벌장은 하루만 서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배에 실려 온 물건, 달구지에 실려 온 물건이 다 팔려야만 파장되었으니, 장이 닷새씩 열흘씩 끄는 것이 예사였다. 자연 사방에서 장사꾼들의 주머니를 노려 논다니들이 모여들고 흥청대기도 하고 남사당패들이 모여들어 놀이판을 벌이기도 했다. 또 장이 계속되는 동안 강가 모래밭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는 일도 많았다. 특히 정월에는 수운의 안녕과 상거래의 번영을 비는 당제가 벌어졌는데,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 줄다리기였으니, 이 줄다리기에는 사방 백리 밖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목계장의 거래 품목으로는 하류로부터 소금, 새우젓, 건어물, 직물, 설탕, 석유 등이 올라오고, 미곡, 콩, 참깨, 담배, 옹기, 임산물 등이 내려갔다. 이러한 물품들은 주로 객주, 여각을 통해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물건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도 많았고 주막과 기생집도 번성하였다. 이렇듯 조선 후기를 거쳐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남한강 수운은 전성기를 보내며 지역의 번영을 이끌어왔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부터 남한강변의 주요 길목에는 신자로가 생기고 철도가 지나가게 되었다. 생활필수품과 목재를 실어 나르던 돛단배와 뗏목은 더 이상 경제적인 운송 수단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을 오가는 상선(商船)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목계 나루터에는 버스와 트럭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찻배가 있었고 인도선도 50~60명을 태울 수 있는 큰 배와 20~30명을 태울 수 있는 배가 있었다. 이 나룻배(도선: 渡船)의 규모는 당시 목계나루의 통행량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팔당댐과 목계교가 완공되자 나룻배와 뗏목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목계마을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목계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업 활동은 서울에서 올라온 어염(魚鹽)과 생필품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의 곡물 등과 교환하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을 중심으로 하는 교역 활동 외에도 더 넓은 지역에 걸친 상업 활동이 있었음을 이중환의 『택리지』 충주목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강을 내려오는 생선과 소금배들이 정박하여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므로 주민들이 모두 장사에 종사하여 부유하다’

목계에서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화물이 모여 판매되었다는 것이다. 동해의 어염은 원주에서 집산되므로 육로와 수로를 통해 목계에 공급되었을 것이고, 영남 산골의 화물은 단양과 제천을 거쳐 육로로 운송되거나 남한강 상류의 물길을 통해 공급되었을 것이다.

1906년경에도 목계에는 객주 15호가 있어 구전(口錢)을 받고 화물을 위탁 판매하였다. 최영준의 「남한강 연구」(『지리학』 제35호, 1987)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목계는 충주 전역을 비롯하여 제천, 원주, 음성, 괴산 그리고 경상도 북부 지역의 상인까지 모여들었던 상업포구였다. 목계에는 7대 여각이 유명하였는데, 그 중 김유관 여각은 안채 5간, 객실 17간, 마방(馬房), 창고 40간에 달하는 규모였다. 목계의 창고에는 10,000석을 저장할 수 있었다’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아랫말에 사는 윤우식 씨의 증언에 의하면, 할아버지 윤종국 씨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곡물과 담배의 운송을 전담하는 일종의 운송업을 하였는데 이러한 객주와 여각의 전통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남한강의 수운은 1930년대를 지나 철도와 도로망이 개설된 후 극도로 위축되어 많은 포구마을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목계의 경우는 1970년대 초까지 나루마을로서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목계마을은 6·25전쟁 이후까지 수운의 기능을 유지하였고, 1963년 팔당댐 공사로 수로가 막힐 때까지 돛단배가 오르내렸고, 뗏목은 수시로 내려갔다. 목계마을에서는 됫섬과 여우섬 주변의 암초를 제거하고 돛단배와 뗏목이 내려갈 때마다 골삯을 받아 마을 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73년 목계교가 건설되기까지 목계나루의 도선 기능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고 다양한 점포들이 밀집되어 있는 상업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목계엄정면의 행정적 소재지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목계에 있었던 기관들을 보면, 농협(예전에는 금융조합)과, 우체국, 경찰지서, 의용소방대, 연초조합, 초등학교, 백화점, 정류소, 정미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온갖 상점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창말에는 1866년 이후 조정의 비환미(備還米, 환곡)를 보관하는 토교(土窖) 12간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엄정, 산척, 소태면의 환곡을 보관하였다.

6·25전쟁 때 마을이 폭격을 받은 이후 길 양쪽으로 즐비했던 기와집과 2층 양옥집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1970년대 전후만 해도 어느 정도 도시의 규모가 남아 있었다. 목계가 오늘날 같이 초라한 마을이 된 가장 큰 요인은 1972년 대홍수 때문일 것이다. 이때 마을의 대부분이 침수되어 아랫마을과 건넛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새마을이나 외지로 이주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습은 급변하게 되었다. 또 다른 요인은 1973년 목계교의 건설이다. 이 다리의 건설로 목계나루가 폐쇄되었으며, 건설인부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내계의 새 동네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이후 1990년 목계마을의 홍수 피해를 알려주는 홍수흔적기념비를 (구)목계우체국 앞에 세워 놓았다.

[정보제공]

  • •  윤우식(남,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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