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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10305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목계교를 건너 목계마을 서쪽 입구 노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고마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들이 있다. 그러면 비문을 중심으로 그들의 공덕을 알아보자.

첫째 목계줄다리기·별신제 유래비와 같은 영역에 세워진 박해성[1862~1923] 송덕비이다. 뒤쪽에 밀려있는 화강암 비석의 전면에 ‘박해성씨가설석교(朴海成氏架設石橋)’, 우측면에 ‘을축 11월(乙丑十一月)’이라고 되어 있다. 을축년은 1925년이다. 그의 공적을 죽은 지 2년 뒤에 간단하지만 함축성 있게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샛강 가에 있던 것을 1988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앞에 있는 비석의 전면에는 ‘밀양박공해성송덕비(密陽朴公海成頌德碑)’라는 비가 있다. 후면에 그의 공적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공(公)은 해성(海成)이시며 밀양박씨(密陽朴氏) 간의공(諫議公) 24세손(二十四世孫)이요 치근씨(致根氏)의 장자(長子)이시다. 1862년(一八六二年) 목계(牧溪)에서 탄생(誕生)하시어 인품(人稟)이 총명준수(聰明俊秀)하시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능해통달(能解通達)하시고 온후자상(溫厚仔詳)한 심성(心性)으로 인보상조(隣保相助)와 위민사업(爲民事業)에 불석심혈(不惜心血)하시어 1904년(一九○四年) 헌성사재(獻誠私財)로 샛강 깊은 물에 석축작교(石築作橋)하여 주민왕래에 제하공덕(濟河功德)을 크게 세우시고 1923년(一九二三年) 졸(卒)하시었다. 당시의 송덕비(頌德碑)가 강변(江邊)에 위치(位置)해 원세풍우(遠歲風雨) 속에 퇴패멸자(頹敗滅字)됨을 강개불무(慷慨不無)하여 주민일동(住民 一同)이 구수의논(鳩首議論)으로 복원건립(復元建立)하고 공(公)의 덕업(德業)을 추모불망(追慕不忘)함.

목계주민일동(牧溪 洞民 一同)

서기 1988년 9월 13일(西紀 一九八八年 九月 十三日)’

두 번째 송덕비는 목계초등학교를 건립하는데 지대한 업적을 남기신 윤해영(尹海英)[1906~1978]의 송덕비이다. 비의 전면에는 ‘파평윤공해영송덕비(坡平尹公海英頌德碑)’라 각자되어 있다. 후면에는 그의 공적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공(公)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소정공(昭靖公)의 13세손(三十一世孫) 해영(海英)이시며 1906년(一九○六年)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주군(忠州郡) 엄정면(嚴政面) 목계(牧溪)에서 부친(父親) 진국씨(鎭國氏)의 차자(次子)로 태어나셨다. 공(公)은 천품(天稟)이 과묵(寡黙) 정직(正直)하신 분으로서 일찍이 한문수학(漢文修學)과 인천상업고등학교(仁川商業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목계(牧溪) 금융조합(金融組合)에 근무(勤務)하시다가 부친(父親)의 사업(事業)을 계승(繼承)하여 근대적(近代的) 정부도정공장(政府搗精工場)을 운영(運營)하시면서 동회장(洞會長)과 국민회엄정면의회의원(國民會嚴政面議會議員) 및 중원군농협감사(中原郡農協監査) 等을 역임(歷任)하시었고 특히 2세(二世) 국민교육(國民敎育)에 힘을 기울여 1948년(一九四八年) 목계국민학교기성회장(牧溪國民學校期成會長) 재직(在職) 中 부지(敷地)와 건물(建物)을 희사(喜捨)하여 목계국민학교(牧溪國民學校) 개교(開校)에 큰 공(功)을 남기셨으며 평소(平素) 위민구휼(爲民救恤)하는 정신(精神)으로 목계근대화(牧溪近代化) 발전(發展)에 헌신(獻身)하신 공로(功勞)가 다대(多大)함으로 농림부장관상(農林部長官賞) 및 각기관장상(各機關長賞)을 수회(數回) 수상(受賞)하시었으니 공(公)의 업적(業績)은 후대(後代)에 귀감(龜鑑)이 되리라. 1978년(一九七八年) 4월(四月) 26일( 二十六日) 향년(享年) 72세(七十二歲)로 영면(永眠) 두무소山 선영하(先塋下)에 안장(安葬)되시니 동민(洞民)들이 공(公)의 유덕(遺德)을 경모(敬慕0하여 영세불망(永世不忘)코자 이 비(碑)를 세움.

서기 1988년 9월 13일(西紀 一九八八年 九月 十三日)

목계 동민 일동(牧溪 洞民 一同)’

세 번째, 강변횟집 앞 노변공원에 이효승의 송덕비가 서 있다. 전면에는 ‘청풍이효승송덕비(淸風李孝承頌德碑)’라고 새겨져 있다. 후면에 그의 공적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청풍(淸風) 이효승(李孝承)선생(先生)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조 10대(李朝十代) 성종왕자(成宗王子) 경명군(景明君) 12대손(十二代孫)으로 1910년(一九一○年) 11월(十一月) 5일(五日) 엄정면(嚴政面) 목계동(牧溪洞) 263번지(二六三番地)에서 출생(出生)하셨다. 본디 재학(才學)과 덕행(德行)이 출중(出衆)하여 1941년(一九四一年) 엄정면장(嚴政面長)에 피임(被任)되셨고 지방자치제(地方自治制) 실시(實施)에 따라 직선면장(直選面長)으로 거듭 피선(被選)되는 등 해방 전후(解放 前後)를 통(通)하여 장장(長長) 14년간(十四年間) 고장발전(故場發展)을 위(爲)하여 헌신(獻身)하셨다. 더구나 옥토(沃土) 1천여평(一阡餘坪)을 희사(喜捨)하여 목계국민학교(牧溪國民學校)를 오늘같이 만드셨고 또한 마을 발전(發展)을 위해 대지(垈地) 3천여평(三千餘坪)을 희사(喜捨)하셨으니 이와 같은 은혜(恩惠) 베푸심이 세상에 어디 그리 흔하리오. 그 높으신 뜻 길이 후손(後孫)에 물리고져 마을 사람 한마음되어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노라.

1990년 4월 10일(一九九○年 四月 十日)

목계동민일동 건립(牧溪洞民一同 建立)’

그런데 ‘목계나루터비’ 건립을 후원한 마을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된 비문 중에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 후원자 이름 중에 다시 메운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윤해영 씨의 아들인 윤우식 씨였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윤우식 씨를 찾아가 보았다.

윤우식 씨는 “학교를 짓고 교장 관사가 들어설 대지가 필요하여 이효승 씨에게 희사를 종용하였으나 응하지를 않았지. 그래서 이상욱 초대교장은 다른 집을 빌려 관사로 썼어. 이후에 아버지(윤해영)께서 이효승 씨의 밭 580여 평과 아버지 소유 논 6마지기(1,200평)를 맞바꿔서 관사를 지었지. 학교 세울 때도 이효승 면장이 허가하지 말 것을 도에 요청하여 도에 들어가 해명까지 하였지. 비석 세울 때도 다른 송덕비가 있는 곳에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내가 허락하지 않아서 현 위치에 세운 것이지. 비석 세우는데 주동한 사람들이 이효승 송덕비와 목계나루터비 후원자 명단이 들어간 비석을 다 만들어 가지고 와서 후원금을 얼마 내달라고 해서 거절했어. 내용이 맞지 않는 비석을 세우는데 후원금을 낼 수 없고 내 이름은 삭제해 달라고 요구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 간에 시비곡절이 있는 송덕비가 세워지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정보제공]

  • •  윤우식(남,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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