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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283
한자 堤內里
영어음역 Jene-ri
이칭/별칭 방죽안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2.48㎢
총인구(남, 여) 312명[남 175명, 여 137명]
가구수 115가구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형성 및 변천]

제내리(일명 방죽안)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세거지로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온 이덕량(李德樑)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여지도서』에 보면 덕면은 6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6개 리는 상, 중, 천서, 제내, 황금곡, 계막이다. 1898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제내리가 속했던 덕면이 석우, 당우, 유동, 창동, 제내, 황금곡, 계막, 사락, 화곡 등 9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 보면 덕면이 26개 리로 현재의 제내리와 관련된 제내리와 풍덕리가 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다시 변화를 겪는다. 제내리와 풍덕리가 제내리로 통합되었으며 방죽안의 한자 명칭인 제내리가 현재의 성동풍덕을 포함하는 공식적인 법정리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17년에 발행된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에 보면, 주덕면이 11개 리로 구성되어 있고 제내리는 그 중 하나로 확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내리의 인구가 가장 많았던 때는 1960년이었다. 당시 제내리 인구는 940명이었다. 산업화로 인한 이농 현상이 가속화된 1970년대 중반부터 제내리의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1996년에는 인구가 1960년대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성동풍덕의 인구가 각각 100명대로 떨어졌다. 농가의 비중도 전반적으로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 이유는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노인이 되면서 농사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고, 농업 소득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제내리에 거주하면서 주덕이나 충주 또는 음성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자연환경]

제내리요도천 북쪽에 위치한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앞의 요도천 변에는 버드내들과 사갑들, 진개들, 공신앞들이 있어 경지 면적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현황]

2008년 현재 면적은 2.48㎢이며, 총 115세대에 312명(남 175, 여 137)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제내리는 비석동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성동과 서쪽의 풍덕으로 나뉜다. 성동은 다시 크게 큰말과 신골로 나뉜다. 큰말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에 형성된 마을이고 신골은 마을회관 동쪽의 마을이다. 마을 이름으로 보아서는 큰말이 먼저 생기고 동쪽 골짜기에 새로운 마을이 생기면서 새말의 한자식 표현인 신골을 사용했던 것 같다.

풍덕은 크게 풍덕, 공말, 구실골로 나누어진다. 풍덕은 마을 입구인 숲거리에서 북쪽으로 길게 형성된 중심 마을이다. 지도에는 상풍덕, 속담말, 음달말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공말은 숲거리 동쪽 비석동산 서북쪽의 마을로 성동의 큰말과 연결된다. 공말 북쪽으로는 건너말이 있다. 구실골은 황새동산과 덕신초등학교 북쪽에 형성된 마을로 구슬골이 발음하기 쉽게 구실골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내리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자손들이 이룩한 마을이며, 현재도 이들이 제내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현재 성동 가구 수(52가구)의 절반 정도인 25가구 정도가 다른 성씨이며, 풍덕은 전체 가구 수(63가구) 중 21가구가 다른 성씨이다. 성동에 비해 풍덕이 집성촌으로서의 모습을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내리 남쪽으로 지방도 525호선이 지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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