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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54
한자 歷史
영어의미역 History
분야 역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집필자 최근영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선사시대]

지리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충주시 용탄동조동리 등의 유적과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를 시사해주고 있다. 이들 유적과 유물은 선사 문화의 시원과 이동, 전파 및 취락의 형태를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선사 유적이 형성된 배경은 어업에 편리한 남한강과 그 주변의 충적평야, 그리고 철 등의 물적 자원과 자연 환경 등에 기인한 것이다.

[삼국시대]

충주지역은 마한연맹체에 속했는데, 백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특히, 삼국은 충주를 차지하는 나라가 강국이 된다고 믿어 쟁탈전을 극심하게 벌였고, 이로 인해 충주는 백제·고구려·신라의 지배를 두루 받아야 했다. 삼국의 충주 지역 쟁탈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왕의 남진정책으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충주·제천·단양·영춘 등지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수도 다음 가는 도시로 승격시켜 남한강 유역 일대의 경영과 신라 정벌을 위한 책원지로 삼았다. 이 무렵 고구려 남진정책의 성공을 기리는 척경적 의미를 지닌 충주 고구려비를 충주에 건립하였다.

고구려의 영토가 된 충주는 70여 년 후 신라의 영토로 바뀌었다. 신라가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던 548년(진흥왕 9)부터 고구려로부터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탈취한 551년 사이에 충주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단양의 적성비는 이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충주가 신라의 지배에 들자 진흥왕은 친히 국원을 순행하고 계속 북진하였다.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6군을 탈취한 뒤, 555년에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 비를 세우고, 마침내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다. 신라는 557년 국원성국원소경으로 개칭하고, 다음해는 신라 중앙귀족의 자제와 6부의 호민을 충주로 사민시켜 군사·정치·문화의 중심도시로 위상을 높여 삼국통일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무렵 국원을 빛낸 인물로는 강수·우륵·니문·계고·법지·만득 등이 있었다. 강수는 가야계 출신으로 백제·고구려를 평정하기 위해 당나라에 청병할 때 외교문서에서 공이 컸다. 문무왕강수를 삼국통일의 공에 있어서 김춘추에 버금가는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우륵 역시 가야계 사람으로 가야금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요컨대 삼국시대의 충주에는 백제·고구려·신라·가야의 문화유산이 공존하고 있다. 백제의 장미산성, 고구려의 충주 고구려비, 봉황리 마애불상군, 신라의 누암리 고분, 우륵탄금대 등은 이러한 공존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통일신라시대]

삼국통일 후 충주는 영토의 중심에 위치한 명실상부한 부도로서 정치·군사·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고, 673년(문무왕 13)에는 국원소경중원경으로 개칭했다. 통일신라시대 충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첫째, 해동필가의 시조로 일컫는 명필가 김생의 활약이다. 둘째, 9세기 전반에 중앙탑(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을 건립한 일이다. 중앙탑 건립의 목적은 9세기에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등장한 지방 세력의 반신라적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불력에 의탁해 신라의 안정을 기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끝내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900년(효공왕 4) 궁예의 부장이었던 왕건은 충주를 비롯한 괴산·청주 등지를 공격하여 후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셋째, 후삼국시대 충주의 대표적 호족 유긍달의 세력이다. 유긍달왕건과 제휴하였고 고려를 건국한 후 왕건유긍달의 딸을 왕비(신명순성왕태후)로 맞아들여 두 왕자(정종·광종)를 낳았다. 광종은 어머니가 죽자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충주에 숭선사(신니면 문락리)를 창건할 만큼 충주에 관심이 컸다. 또 다른 호족 유권열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에서 보듯이 ‘중원부(中原府)’란 독자적 지방 조직을 가지고 있던 세력가였다. 당시 충주유씨 유긍달 등 중원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과 제휴한 것은 후삼국 통일을 앞당기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충주 지역의 위상은 고대와는 달랐다. 우선 지역의 명칭이 940년 중원에서 충주로 개칭되었다. 특히 주목을 끄는 변화는 충주가 국내 분쟁의 거점 지역에서 벗어나고 거란·홍건적·몽고·왜구 등의 이민족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충절의 고장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231년 몽고 제1차 침입 때 충주 지역 노비 출신 지광수는 노비와 잡류별초를 이끌고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1253년 몽고 5차 침입 때 70여 일간 충주산성(현 대림산성)에서 충주민의 항전은 몽고군의 남진을 완전히 차단시킨 승전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승리에 대한 공을 인정하여 전쟁에 참여한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관노비에게도 군공에 따라 벼슬을 주었으며, 충주를 국원경으로 다시 승격시켰다.

1254년 철제 도구의 생산지인 다인철소(이류면)의 거주민의 대몽항전도 공이 커서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소(所)를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외에도 월악산 전투(1256), 충주 별초군의 제천 박달현 전투 등 대몽항전에서 10여 차례가 넘는 승전이 있었다. 이 같은 승리는 삼국시대 이래 지역적 역사성에서 연유된 자위적 호국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갈 때 충주에 잠시 머물기도 했고,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신돈이인임은 충주 천도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충주민의 국가 보위를 위한 애국심은 강하였다. 조선 중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주민들은 외적에 맞서 싸웠고, 한말 의병전쟁 때도 그러했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8천여 병사와 함께 순절한 신립 장군, 500명의 의병을 이끈 중앙탑면 가흥리 출신 의병장 조웅, 병자호란 때 활약한 임경업 장군 등은 충주의 우국충절을 돋보이게 하는 인물들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하여 2개월 동안 있다가 환궁한 것도 지나쳐 볼 일은 아니다.

[근현대]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제천에서 거병한 의병장 유인석충주성을 함락한 뒤 친일적인 충청도관찰사 김규식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격고팔도열읍’의 격문을 포고하여 모든 관리들은 의병을 후원해 나라를 지킬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충주를 거점으로 한 의병전쟁은 전국적 의병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의 강압을 받던 1908년에 충주에 있던 충청북도 도청이 청주로 이전된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충주 지역민의 애국 충절의 기질을 꺼려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충주 지역민의 삶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륙 물류 경제의 중심지였던 가흥창이 폐지되고, 경부선과 중앙선이 충주를 벗어나 개통되었고, 특히 충청북도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충주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3월 11일 달천리 천도교인들의 독립 만세 운동, 3월 12일 충주읍에 모인 수천 명의 독립 만세 운동, 4월 1일 신니면 용원장터에 모인 200여 군중들의 독립 만세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지역 주민들의 애국심은 6·25전쟁 때 신니면 동락전투에서도 나타났다. 동락전투는 충주시 신니면에 살던 김재옥 교사가 정보를 제공하여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가 북한군 15사단 병력 2,186명을 섬멸한 전투였다.

근현대 행정구역의 변천을 보면, 1917년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고 1913년 4월 1일 충주가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법」이 공포되어 같은해 8월 15일 시행되었다. 충주읍은 1956년 7월 8일 충주시로 승격되어 14개 동을 관할했다. 충주군중원군으로 개칭되어 12개 면을 관할하였다. 1963년 1월 1일 괴산군의 상모면(현 수안보면)이 중원군에 편입되었다.

충주시와 중원군은 1995년 1월 1일 「도시와 농촌의 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제477호) 시행에 따라 새로운 충주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인구는 22만 명을 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충주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부내륙고속도로의 개통, 국도 3호선의 4차선 완공, 안중-충주-삼척을 잇는 동서고속도로 공사, 중부내륙철도 개설, 기업도시 유치 등 지역 발전의 새로운 기반 시설들이 정비되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15 행정지명 명칭 현행화 가금면에서 중앙탑면으로 변경 사실 반영
이용자 의견
관** 호성스님의 글은 서비스 정책에 맞지 않아 삭제되었습니다. 201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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