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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63
한자 中原京
영어의미역 Jungwonsogyeong Administrative District
이칭/별칭 중원소경,국원,국원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757년(경덕왕 16)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757년(경덕왕 16)

[정의]

통일신라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6세기경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충주 지역을 빼앗은 뒤 그곳에 국원소경을 설치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과 중국의 당, 일본까지 관련된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장악했으며, 고구려는 당에 의해 멸망되고 그 땅에서 발해가 건국되었다. 이후 신라는 늘어난 인구와 영토에 대하여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를 지속해 나갔는데, 지방제도의 개편도 그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신문왕 대에는 이른바 9주(九州) 5소경(五小京) 제도의 완성을 보았다. 678년(문무왕 18)과 680년(문무왕 20)에 각각 북원소경(원주)과 금관소경(김해)이 설치되고, 685년(신문왕 5)에는 서원소경(청주)과 남원소경(남원)이 설치됨으로써 국원소경을 포함하여 5소경 체제가 성립되었다. 백제 지역을 포함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9개의 주로 정비하였던 것이다. 757년(경덕왕 16)에는 각 지방의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이때 국원소경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중원이란 명칭이 갖는 의미는 국토의 중앙이라는 것으로, 이는 중앙탑이라 불리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의 존재를 통해서도 유추된다. 우뚝 솟은 위용을 자랑하는 중앙탑은 사찰 안에 만든 탑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호국적 불력(佛力)으로 신라적 지방 세력과 민심을 어루만짐과 동시에 국가적 안정을 기원하는 상징적 원탑(願塔)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중원 지역이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관련기록]

『삼국사기』지리지 한주(漢州) 기록에는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문무왕 때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步)였다. 경덕왕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충주(忠州)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한 이후의 역사서에서는 이 내용을 받아들여 연혁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이미 중원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국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22년(헌덕왕 14)의 김헌창의 반란에서 국원경이 등장하고 있고, 899년(효공왕 3) 양길이 국원 등 10여 곳의 성주들과 궁예를 공격하다가 패하였다는 내용에서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신라 말까지도 공식적인 중원소경이라는 명칭 이외에 국원이란 이름도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중원소경의 위치가 충주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중심지, 즉 치소(治所)가 어디였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형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기록된 중원소경성(中原小京城)의 크기(2,592보)에 의거하여 치소를 비정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성의 둘레를 현재의 미터법으로 환산하고, 이것을 다시 현재 충주 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과 비교하여 이와 유사한 둘레를 가진 성곽을 중원소경성으로 비정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충주시내 외곽에 일부 잔존하는 것으로 기록, 전승되는 소위 봉현성(逢峴城)의 터를 중원소경성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중원소경을 현재 충주시내로 상정하고 중원소경성을 봉현성 터로 볼 경우,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원소경성의 크기와 대체로 일치되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럴 경우 현재까지 충주 지역에서 조사된 유적 유물의 분포와 부합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즉 대부분의 고대 유물은 중앙탑면 일대에 존재하고 있는 데 반하여, 봉현성 터가 존재하고 있는 현 충주 시가지에서는 주로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러한 유적과 유물의 상황을 고려하여 중원경탑평리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는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탑평리 일대에서는 2,592보에 가까운 성곽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국원소경과 중원소경은 명칭만 바꾼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같은 위치일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소경이 같은 위치일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국원성·국원소경·중원소경 등에 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유적이나 유물도 위치를 명확하게 증명할 만한 결과물은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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