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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65
한자 金憲昌-亂
영어의미역 Kim Heonchang'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반란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822년 3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822년 4월[추정]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공주시
관련인물/단체 김주원|김헌창|김범문

[정의]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사건.

[개설]

『삼국사기』에는 “822년 3월에 웅천주 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며 장악한 지역 중에 국원경(國原京)이란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충청북도 충주시에 설치되었던 중원경(中原京)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라 말까지 국원경이란 이름이 중원경과 함께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역사적 배경]

신라 중대(태종 무열왕~혜공왕) 왕위 계승을 독점하던 무열왕계는 비무열왕계인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785년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인 김주원이 왕위 계승 1순위 후보로 귀족들에게 추대되었다. 그러나 김경신(金敬信)[후의 원성왕]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로 밀려나고 말았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이후에도 신라의 중앙에서 활동하였으나 헌덕왕(憲德王)이 즉위하고 나자 역시 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813년(헌덕왕 5)에는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 도독, 816년(헌덕왕 8)에는 청주(菁州)[지금의 진주] 도독, 821년(헌덕왕 13)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옮겨 다녔다.

지방을 전전하던 김헌창이 이듬해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반란의 명분이자,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던 무열왕계의 반격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헌창의 반란은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범내물왕계 중 왕권을 차지한 김경신 일파 사이의 첫 번째 대결에 이은 두 번째 대결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가장 막강했던 양대 세력의 대결로 말미암아 급속하게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다.

[경과]

김헌창은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한 뒤 무진주·완산주(完山州)·청주·사벌주(沙伐州)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청주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은 김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3월 18일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 김정련(金正連)의 아들 김영충(金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하여 이 사실을 헌덕왕에게 알렸다.

반란 소식을 접한 헌덕왕은 장수 여덟 명을 뽑아 여덟 방면에서 서울을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김위공(金衛恭)과 파진찬 김제릉(金悌凌)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찬 김균정(金均貞)과 잡찬 김웅원(金雄元), 그리고 대아찬 김우징(金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김충공(金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김헌창의 군사를 공격하여 이겼고, 김위공과 김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을 쳐서 이긴 뒤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김헌창 군을 섬멸하였다. 김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김헌창 군을 무찔렀으며, 여러 군대가 함께 웅천주에 이르러 김헌창의 군사와 싸워 크게 이겼다. 김헌창은 웅천성을 닫아걸고 열흘 동안 굳게 지켰지만 장차 성이 함락되려 하자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김헌창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결과]

김헌창의 난이 진압된 뒤 김헌창의 무덤을 파헤쳐 김헌창의 몸을 다시 베고 그의 종족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 239명이 죽음을 당했으나 김헌창이 다스리던 백성들은 풀어 주었다. 또한 삽량주에 속한 굴자군(屈自郡)은 지리적으로 김헌창의 지배 영역과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의의와 평가]

김헌창의 난이 진압되고 종족들을 대거 처형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후에도 무열왕계의 활동이 활발히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족들만이 그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무열왕계 귀족들이 크게 몰락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후의 무열왕계는 중앙에서 활약하더라도 원성왕계의 후손들이 주도하는 왕위 계승 쟁탈전에 조력자로 참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왕위의 계승이나 정국의 중심적 지위는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헌창의 반란도 진골 귀족 사이에 벌어졌던 신라 하대 사회의 왕위 계승 쟁탈전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오******* 대단하십니다..근데 간략하게 하시면 더욱 좋을듯^^ 2011.06.12
ㅇ**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목적은 무엇인가용? 201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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