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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304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1945년 광복 직후인 12월 풍덕마을의 이부영 등 젊은 청년들 16명은 계몽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의 계몽활동에 뜻을 두고 일제하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을 펼치면서 야학을 시작하였다.

야학은 계몽회 회원인 이상갑의 사랑방을 빌려서 시작하였는데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굳세게 밝게 바르게 생활하자는 뜻으로‘강(强)·명(明)·정(正)’의 회훈을 정하였다. 이달영이 노랫말을 지은 ‘계몽의 노래’도 만들어 불렀다. ‘계몽의 노래’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깨치세 배우세 우리의 한글

계몽에 매진한 양양한 사명

열열한 우리 정신 일층 더하여

굳세게 나아가는 우리 계몽회

고적의 악풍을 씻어버리고

인격을 닦으며 정의를 밟아

끝까지 지켜가는 우리의 회훈

밝은 길로 나아가는 우리 계몽회

강명정 정신의 용기를 내어

피끓는 이 정신 희망은 크다

나아가는 앞길은 탄탄대로다

곧은 길로 나아가는 우리 계몽회

계몽회원인 이세영이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고, 이복영은 한문과 축문을 담당하였다. 아침에는 마을 안길 청소로부터 시작하여 밤에는 야경을 돌며 밝은 마을을 만들기에 앞장섰다. 또한 1946년에는 문제가 되었던 높은 소작료를 해결하기 위해 지주들을 설득하여 3·1제를 관철하였으니, 이는 정부의 시책보다 앞선 것이었다.

이처럼 계몽회는 다방면의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문맹퇴치운동으로 문맹자가 전혀 없는 마을을 만들었다. 둘째 도박 단속으로 노름 없는 마을로 만들었다. 셋째 야경을 철저히 돌아 도난을 방지하는데 기여했다. 넷째 계몽회를 통해 마을의 협동과 단결을 가능하게 했다. 다섯째 계몽회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단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활동이 알려지자 1957년에는 문맹퇴치의 공으로 도지사와 문교부장관의 표창도 받았다. 이후 1958년까지 활동이 지속하였으니 광복 직후의 혼란과 낙후된 마을의 발전에 초석 역할을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초대 회장으로는 이부영(1945~1946)이 2년간 맡아 보다가 이세영(1947~1958)이 해체할 때까지 일을 맡아 보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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