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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306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지역사회개발 사업은 1958년 10월 이 사업을 추진할 ‘지역사회개발중앙위원회’가 조직되어 각 도 및 군 단위의 지역사회개발위원회가 결성되며 시작되었다. 관 주도로 시작된 지역사회 개발사업은 군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군의 관계과장, 교육감, 농사교도소장, 협동조합장 및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된 4명의 지도원으로 ‘지역개발군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 밑에 시범부락의 부락민으로 구성된 ‘지역개발부락계’가 조직되어 사업을 추진하였다.

제내리에서도 1959년 지역사회 개발 시범부락으로 선정되면 3년간 주민의 숙원 사업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팔영·이우영·이세영 등이 풍덕마을를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7월 27일에 중원군의 시범부락으로 선정되었다. 그리하여 9월 1일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된 지도원 내외가 부임하여 상주하면서 홍민희 지도원은 마을 조사, 부락민의 요구사항 및 숙원사업 등의 기초 조사를 시작하였고, 부인 이옥기는 부녀회조직, 청소년과 주민교육 등을 담당하였다.

풍덕마을은 이 사업을 원만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동년 10월 1일 “계원 전체가 자조 자립을 신조로 하고, 합심 협력하여 지역사회 개발에 관한 사업을 시행함으로써, 부락의 경제·사회·문화생활의 전반적 향상을 도모하고, 국가와 민족의 부강과 민주적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풍덕부락 지역사회 개발계’를 조직 창립하였다. 풍덕마을에 거주하는 세대주를 계원으로 함으로써 전 부락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된 조직이었다. 계장은 이우영이 맡았고, 부계장 1명, 평의원 8명으로 출범하였다.

이 개발계에서는 보조사업으로 생산성과 실질소득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마을의 소득증대를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년간 개발사업을 위해 지원된 금액이 500만환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임금이 하루 500환 이었으니 1만 명의 노임에 해당하고, 쌀 한가마니의 값이 1만 7천환이었으니 294가마니가 된다. 당시 논 한마지기에서 나오는 소출이 상답의 경우 쌀 두 가마니 정도였으니 147마지기에서 얻은 수확과도 같은 양이었다.

당시 펼쳤던 중요 사업을 살펴보면 ① 도정공장 ② 가공공장 ③ 구매점 ④ 양어장 등을 신설하여 운영하였고 육추사업을 하기도 했다. 1960년 1차년도 보조금으로 시작한 첫 사업은 양곡 도정공장의 신축 이전이었다. 신촌에서 매각하는 도정공장을 인수하여 기계 일체를 풍덕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도정공장을 지었다. 당시 보조금은 150만환 이었고, 마을의 자부담이 123만 8천환이었다. 현미기 1대, 정미기 2대, 정맥기 1대, 제분기 1대, 발동기 1대 등의 기계를 설치하고 1960년 4월 9일 준공식을 가졌다. 아울러 이 공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전문 8장 44조의 양곡 도정공장 관리 규칙을 만들어 운영에 철저를 기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차년도(1961년) 보조금으로 시행한 사업은 농산물 가공공장의 준공이다. 당시 농산물 가공공장은 농촌의 시간과 경비절약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국수를 만들고 기름을 짜거나 떡방아를 찧기 위해서 반드시 주덕으로 나가야만 했던 당시의 불편함을 해소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업의 하나였다. 도정공장 앞에 터를 닦아 건물을 올리고 1961년 4월 9일 농산물 가공공장을 준공하였다. 비용은 보조금 130만환에 자부담 75만 8천원 등 총 205만 8천원이 소요되었다. 그 후 이 건물은 창고로 사용되었고, 가공공장의 기계는 모두 도정공장으로 이전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3차년도 사업은 양어장을 조성하고 구매점을 건립 운영하였다. 양어장의 조성사업은 1962년 2월 방풍림 앞의 논 400평을 매입하여 착공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4월 15일 양어장이 준공되었다. 보조금 70만환, 자부담 2만 4천환의 공사비가 들었다. 1973년에는 이 양어장에 분수를 설치하여 숲거리의 풍경과 어울려 훌륭한 쉼터 역할을 하였고, 마을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였다. 그 후 1975년에는 준설을 하기도 하는 등 소득 증대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경제적 효용가치가 떨어져 1995년 12월 매립 처리하였으며 그 자리에 풍덕문화생활관이 건립되었다.

구매점은 방풍림 안에 건평 20평 규모로 3월에 착공하여 4월 25일 준공하였다. 보조금 25만 3천 6백환에 자부담 36만환이었다. 이 건물은 13평을 구매점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7평은 개발계와 농협의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이 밖에도 1961년 4월 미국 극동 개발재단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동력분무기를 양여 받아 병충해 방제 사업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으며, 우물 개·보수와 변소 개량사업도 펼쳤다. 당시 풍덕마을에서 독자적인 우물을 가지고 있던 집은 불과 8가구 정도였고 나머지 70여 가구가 공동우물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사업비에서 자재로 시멘트 350포대를 보조하여, 보다 위생적인 우물로 개수하였다. 또한 인분을 저장할 수 있는 액비통도 만들어 재래식 뒷간을 개량변소로 교체할 수 있도록 화장실 개량사업에도 지원하였다. 이 사업은 마을의 위생과 청결을 개선시켜 줌으로써 농촌 삶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69년 6월 30일에는 가공공장을 개조해 비료창고로 쓰던 건물을 철거하고 병아리 사육사를 짓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회가 가톨릭구제위원회의 양곡 지원 사업에 의거하여 지역사회 개발 사업에 대한 후원으로 잉여양곡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주덕의 이수득 씨가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에 이세영이 병아리를 기르는 양계 사업계획서와 설계도면을 가지고 신부와 상의하여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에 비료창고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자부담이 없이도 큰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됨으로써 마을에서도 크게 환영하였다. 다만 터 닦는 일은 마을에서 담당하기로 하고 한 집에서 하루씩 동원되어 한 달여 동안의 노력 끝에 양계장 건물을 준공하였다. 당시 천주교로부터 소맥분 401포대의 양곡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후 양계사업의 불황으로 병아리 사육사업은 포기하고 다시 비료창고로 사용하게 되었다.

지역사회개발계는 1960년도 도정공장을 세울 때부터 가공공장, 양어장, 구매점, 양곡창고 및 1969년 양계장 건물을 건립하기까지 계원들의 노동력동원에 대한 ‘사역증권’을 발행하여 계의 자산으로 산정하고 있다. 증권에는 “본계 사업 관리 규정에 의하여 별기재와 여히 사역하였음으로 이 증권을 교부”한다고 하였다. 질권(質權) 설정을 할 수 없으며, ‘본 증권에 대한 지분 청구는 본계사업이 해산하였을 시에 한함’이라는 계약에 따라 현재까지도 효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사역에 동원된 실 인원은 116명이고, 이들이 각 공사에 사역한 연 인원수는 다음의 표와 같다.

이와 같이 지역사회개발계는 그 운영 면에 있어서도 치밀하고 철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방풍림계에서 지원하던 마을 경비를 1966년부터 부담하여 오다가 1980년 1월 18일에 방풍림계로 흡수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대계장은 다음과 같다.

이우영(1959. 10. 1~)·이상필(1959. 12. 28~)·이세영(1960. 1. 29~)

이동일(1961. 5. 15~)·이중영(1962. 2. 28~)·이우영(1963. 8. 14~)

이상억(1964. 8. 12~)·이동일(1965. 8. 10~)·이우영(1966. 9. 10~)

이세영(1973 9. 30~1980. 1. 18)

* ( )안의 연월일은 임기의 시작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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