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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조합과 마을금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308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과거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지나치게 높고 이자가 장리(연리 5할)의 고율이었기 때문에 땅을 가지지 않거나 돈이 없는 소작농과 가난한 농민은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농지 개혁으로 소작료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농촌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고리채로 인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풍덕마을에서는 1961년 1월 풍덕신용조합을 창립하여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고리채를 해결하고 가난한 주민들의 어려움을 덜어보자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여기에 78명의 조합원이 참여하여 전문 10장 66조의 신용조합 규약을 만들고 조합장에 이팔영, 간사는 이세영이 담당하고 운영위원 5인과 융자위원 5인 감사 2인의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여·수신업무를 통해 고리대 자본을 없애고 농촌부흥과 농민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창립하게 된 것이다. 총 자본금은 160만환이었다.

처음에 이자는 연 3할로 하되 연차적으로 인하하여 법정 이자에 가깝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 정부가 고리채 정리를 위한 범정부적인 사업을 펼침으로써 신용조합의 업무는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2년 동안 신용사업을 유지하다 끝내 해산하게 되었다. 본래의 목적을 군사정부가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신용조합의 발생은 순수한 민간 협동조합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즉 6·25 전쟁 이후 경제재건을 위한 활발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주도 하의 농·수협 등의 협동조합과는 달리 종교단체와 성직자들에 의하여 순수한 민간운동 형태의 자발적인 협동조합 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이 신협이었다. 1960년 5월 1일 메리가별(Sister Mary Gabriella Mulherin) 수녀와 6월 26일 장대익 신부에 의하여 시작된 신협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전국에 확대되었는바 제내리에서도 농촌의 고리대 문제를 마을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을발전에 앞장서는 놀라운 발상과 다함께 참여하는 주민들의 열의 또한 높이 살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용조합의 해체 이후 마을 주민들은 농촌의 고리채 근절이 어렵게 되자 항상 고심하며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비영리적 신용협동조직인 마을금고를 탄생시킨 것이다. 1969년 3월 마을금고 지도자 중앙교육을 이수하고 돌아온 이세영이 주민들을 설득하여 4월 25일에 풍덕 마을금고를 탄생시킨 것이다.

마을금고는 1964년 민간화된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마을금고를 기본사업으로 채택하면서 전국에 확산되었다. 마을금고를 한국의 전통적인 상조제도·협동조직에 결부시켜 전국에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재건국민운동을 전통에 기반을 둔 일종의 민족적 운동으로 자부하려는 운동본부 측의 의도가 강하게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일한 종류의 협동조합 운동이었던 신용협동조합이 가톨릭조직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던 것에 대하여, 재건국민운동중앙회 측은 마을금고를 한국 고유의 제도로 부각시키려 노력하였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상조와 이해를 바탕으로 조합원들에게 규칙적인 저축을 권장하고, 조성된 자금을 저리로 융자하여 주는 비영리적 신용협동조직이었던 풍덕 마을금고는 재건국민운동 충남북도지부의 계도 하에 61명이 참여하여 조합원을 구성하고 충남북 최초로 창립하였다. 그 후 풍덕 마을금고는 신용협동조합법에 의해 1973년 3월 7일 재무부 장관의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74년 6월 19일에 마을금고 연합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날로 발전하였다.

인근마을에서 대출을 희망하여 오기도 하였으며, 춘궁기와 칠궁기 등 어려운 시기의 생활자금과 비료대금 등의 영농자금, 교육자금 등을 저리로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니 농민들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협동조합이었다. 인근 마을에서 마을금고 타령을 할 정도로 풍덕마을을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8년부터 공금융이 활성화되고 마을의 규모도 작아지면서 마을금고의 기능이 위축되었다. 거기에다가 1979년에는 마땅한 관리자를 구하지 못하고, 대출 자금의 회수도 원활하지 못하였으며, 운영의 미숙으로 끝내 문을 닫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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