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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C020702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제내리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금석문으로는 풍덕마을의 동쪽 언덕인 제내리 353번지에 입향조 이덕량의 장남인 이정지(李廷芝)의 묘와 묘역 입구에 묘비가 있다. 묘역은 넓고 여러 기의 묘가 있다. 이정지의 묘는 가장 상부에 있으며 10여 평의 규모에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묘비는 묘역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마을쪽 언덕 위에 있으며 비각을 세우고 있어 이채롭다. 비석의 총 높이는 221㎝이며, 비신의 높이가 174, 폭 58, 두께 29㎝이다. 지붕돌은 103×69㎝에 높이가 47㎝이며, 대석은 105×73㎝이다.

비문의 횡액(橫額)은 증호조참판이공묘갈명(贈戶曹參判李公墓碣銘)이고, 종액(縱額)은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이공묘비명병서(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墓碑銘幷序)’ 라 하였다. 비문 말미에 ‘숭정 갑신후2 경술12月 日 이세환 찬, 조언신 서, 정익하 전(崇禎 甲申後二 庚戌十二月 日 李世煥 撰, 趙彦臣 書, 鄭益河 篆)’이라 하고, ‘4경자11월 일 이수, 4계축 2월 일 이수(四庚子十一月 日 移竪 四癸丑二月 日 移竪)’라 기록하고 있는 전후 양면비이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1730년에 세웠으며, 1840년과 1853년에 옮겨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언덕을 비석동산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이다.

풍덕마을의 마을 자랑비는 풍덕마을 입구인 제내리 306번지 방풍림 안에 있다. 3단으로 조성한 85㎝ 높이의 기단 위에 높이 46㎝, 폭 76㎝, 두께 15㎝의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17㎝ 높이의 덮개돌을 얹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마을은 1595년 임진왜란을 피해 온 리덕량(조선 진안대군 후손)에 의해 정착한 마을이며, 마을이름은 풍덕이라 명명함은 진안대군 묘소가 있는 개성 풍덕동명을 묘사했다. 앞으로는 요도천이 흐르고 뒤로는 우등산과 황금산이 둘러 있어 풍요의 지형이다. 늘 덕과 인정이 흘러 넘쳐 타 마을의 부러움을 샀고, 더욱 백여 년 전 동민이 힘을 합쳐 조성한 동구 앞 버드나무 숲은 풍치를 자랑하면서 선현들의 얼이 숨쉬고 있다. 풍부한 자원과 선조들의 유덕으로 젊은이들이 마을을 가꾸며 경로효친의 실천과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낙후된 농촌을 부흥시켜가며 새 시대를 지향하는 모범마을로서 동민의 뜻으로 이 자랑비를 세우다.

1991. 10. 31. 마을 주민 일동’

이석호 불망비는 풍덕마을입구 방풍림이 있는 제내리 306번지에 있다. 1906년에 방풍림을 조성하고 방풍림계를 창시한 이석호[1866~1922]의 기념비이다. 비문은 전면에 ‘방풍림창설계장 참봉이석호 영모불망비(防風林創設契長 參奉李錫浩 永慕不忘碑)’ 라 하고, 양옆에 ‘종수차허 리미인요 수계보폐 추모기은(種樹遮虛 里美人饒 修契補弊 追慕其恩)’ 이라 하였으며, 후면에는 ‘방풍림창설오십주년기념단기사이팔팔년 심월 일입계원일동(防風林創設五十週年紀念檀紀四二八八年 三月 日立 契員一同)’ 이라 기록하였다.

1955년에 세웠으며, 비의 높이가 157㎝이며, 비신의 높이 97㎝, 폭이 37㎝, 두께 15.5㎝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33㎝, 비 받침의 높이가 27㎝이다.

방풍림비 역시 풍덕마을의 입구인 제내리 306번지 방풍림에 세워져 있다. 풍덕마을 입구에는 본래부터 숲이 있었으나 고사되어 없어지게 되자, 1906년에 이석호 등이 주동이 되어 마을의 입구가 허함을 막기 위해 호당 겉보리 한 말씩을 각출하여 조림을 하고 방풍림이라 이름하였다. 방풍림을 보호하기 위해 계를 조직하고 유지해온 내력을 기록한 기념비가 바로 방풍림비다. 방풍림계 창립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세웠음을 말미에 기록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춘 큰 비석으로, 비의 총 높이가 416㎝이며, 비신의 높이는 206㎝, 폭이 93㎝, 두께 43.5㎝이다. 귀부의 높이는 69㎝, 귀부좌대의 높이가 47㎝이며, 이수의 높이가 88㎝이다.

성동 4H 기념비는 성동마을 입구의 쉼터 앞에 1959년 8월에 세웠다. 65㎝ 높이의 자연적인 대리석판에 4H를 상징하는 4엽 클로버를 새기고 그 밑에 ‘승동 4H 구락부’라 하였다. 좌대는 높이 63㎝의 자연적인 석회암이며 그 밑에 또한 103㎝ 높이의 자연석을 놓고 있다.

보기에도 빼어난 모습이다. 이 안내판은 안내판 경진대회에서 전국 일등상을 받아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풍덕마을 입구인 525번 도로변에는 전주이씨 세거지비가 세워져 있다. 거대한 자연석의 앞면에 ‘전주이씨진안대군파세거지(全州李氏鎭安大君派世居地)’ 라 새겼다. 1998년 7월에 세운 세거지 표석으로 뒷면에는 ‘세거지유래비(世居地由來碑)’라 하고, 다음과 같이 그 내력을 기록하였다.

‘조선국 태조 고황제의 장남 진안대군의 후손 통정대부 호조참의 이덕량(李德樑)께서 임진왜란을 피하여 서기 一五九五년경 방호(芳湖)[방죽안]에 성동 큰말 풍덕을 개척하여 정착하시니 자손 번창하고 세세손손 계승하여 반 천년에 이르니 세거지로 길이길이 이어질지어다.

서기 一九九八년 무인 七월 일

21세손 상을 상수 상면

22세손 영배 길배 철배 용배 승배 세움’

자연석 비신의 높이는 378㎝이며, 폭은 일정하지 않으나 중간부분이 103㎝이며 두께가 54㎝이다. 여기에 좌대의 높이가 58㎝이다.

성동마을 입구 525번 도로변에도 제내리 개척비가 세워져 있다. 제내리의 입향조인 이덕량이 마을을 개척한 동기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호조참의전주이공휘덕량개척비(戶曹參議全州李公諱德樑開拓碑)’라 새겼으며, 후면에는 ‘공(公)은 조선국 태조고 황제 장남(朝鮮國 太祖高 皇帝 長男)이신 진안대군방우 시정의공(鎭安大君 諱 芳雨 諡靖懿公)의 팔대손(八代孫)이시다. 공(公)의 연세 17(年歲 十七)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국민(國民)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할 때 6세 제 덕전(六歲 弟 德栓)과 괴산(槐山)에서 충주 진포평(忠州 陳浦坪)으로 피난(避難)하셨다. 그후 이곳 방호(芳湖)에 터를 닦아 방죽안(堤內里)을 창건(創建)하시고 자 삼형제(子 三兄弟)를 두시어 지금까지 자손 수백여호(子孫 數百餘戶)가 4백여 년간(四百餘年間)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렇게 동내(洞內)가 번창(繁昌)한 것은 공(公)의 높은 음덕(蔭德)이시다. 자손(子孫)이 감사지념(感謝之念)을 영전(永傳)키 위(爲)하여 개척비(開拓碑)를 근수(謹豎)하나이다.

서기 1998년(西紀 一九九八年) 무인(戊寅) 8월 15일(八月 十五日)

10대손(十代孫) 하계(河溪) 주호(周浩) 근수(謹竪)

후원(後援) 방호파(芳湖派) 대종회(大宗會)’

마을 개척의 유래를 간략하게 기록하였고, 1998년 8월 15일에 방호파 대종회 후원으로 10대손 하계 이주호가 세웠다고 하였다. 비는 이수와 귀부를 갖춘 화강암으로 총 높이는 305㎝이며, 비신의 높이는 144, 폭 54.5, 두께 24㎝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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