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공출미를 도정하던 영단 방앗간과 윤해영의 선행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10303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1940년에 세워졌던 담배 수납장이 특이하게 생겨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윤우식 씨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6·25전쟁 때 불타버렸고 미군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1950년대(혹은 1960년대) 말에 재건축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인터뷰 과정에서 영단 방앗간의 창고 건물의 상량문이 남아 있어서 그 건립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하여 확인하기 위해 다시 들렀다. 행랑채로 창고처럼 쓰는 건물이 더 오래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윤우식 씨 부친인 윤해영(尹海英)[1906~1978] 씨가 방앗간을 이곳으로 옮기기 전부터 일본인이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천장이 반자로 막혀있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든 창고 건물 천장을 확인해 보니 상량문이 남아 있었다. 상량문에는 ‘재세 을해 8월 29일 진시 상량(在歲 乙亥八月 二十九日辰時 上樑)’이라는 문구가 남아있었다. 을해년은 1935년이다. 원래 방앗간은 목계동 299번지에 있었는데, 병자년(1936년) 장마에 큰 수해를 입어 사무실과 창고가 있던 자리를 확장하여 이전하였다.

윤우식 씨의 증언에 의하면, 윤해영 씨는 서울에서 상업학교를 다니다가 1919년 3·1운동 후에 졸업하고 내려와 목계 금융조합에 취직을 하였는데 발령이 나지 않자 일본으로 건너가 15마력과 16마력 발동기를 사와 방앗간을 세우고 도정 사업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엄정, 소태, 산척, 금가, 앙성, 동량면 등에서 공출로 받은 벼를 도정했고, 해방 후에도 정부미를 도정했다.

충주 북부 지역에서 공출 받은 벼의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1,000석 이상을 저장할 수 있는 큰 창고도 있었다. 영단 방앗간은 도정 사업과 관련하여 마을 사람들을 노동자로 썼기 때문에 고용 창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 향상에도 일정 역할을 하였다. 또 도정 과정에서 나오는 각종 부산물을 당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목계마을의 사람들과 인근 지역의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명절 때는 가래떡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려주어 조상들을 모시고 제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평소에도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목계초등학교를 설립할 때 부지(敷地)를 희사하였으며,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목재를 불법으로 구입하였다고 밀고를 당하여 경찰서에 드나드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윤우식 씨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방앗간을 운영하여 많은 돈을 벌자 학교를 세워 우리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쳐보자는 뜻을 세우셨어. 그 시절에는 장마가 질 때면 목계강 변에는 수박, 돼지, 집지을 때 쓸 만한 통나무들이 떠내려 왔어. 그럴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강변으로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건을 건져 올렸어. 많이 건져 올린 사람들은 10~20여 개씩이나 되었지. 아버지께서는 마을 사람들이 건져 올린 재목들을 사들여서 송판을 켜서 학교 지을 건축 자재를 마련하셨어” 라고 하였다.

이어서 학교 지을 때 비화(秘話)가 있었는지를 여쭤보았다.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지. 해방되면서 바로 학교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학교를 짓는 중에 마을 사람 3명이 경무대 경찰서에 ‘개인이 학교를 짓는다’ 고 투고(投告, 필자주:投書를 말함)를 했어. 이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께서 경무대에 올라가서 이승만 대통령께 해명을 하셨어. 일제강점기에 공출미를 찧는 방앗간을 운영하여 돈을 꽤 많이 벌었는데, 제가 사립학교를 설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이 엄정국민학교를 다니는데, 멀기도 하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냇물을 건너지 못해서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있어서 제가 학교를 지어 나라에 기부체납을 할 것이라고 하셨지. 이 말을 들으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훌륭한 일을 한다고 칭찬을 하시고 짚차를 내주셔서 목계까지 짚차를 타고 내려오셨지. 학교를 다시 짓기 시작하자 당시 엄정면 민선 면장이었던 이효승 면장이 면소재지가 아닌 목계에 왜 학교를 세우느냐고 도청에 항의하자 누군가 연락을 해줬어. 아버지께서 도청에 찾아가 대통령이 허락한 사실을 이야기해서 학교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어. 목계 주민들이 학교 짓는데 정말 열심히 협조해줘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어. 그 결과 6·25 전에 학교가 개교하게 되었지” 라고 말씀해 주셨다.

『목계면지』의 기록에 보면 1948년 9월 1일 엄정초등학교 목계분교장으로 개교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마을의 주민들을 위해 베푼 선행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목계줄다리기·별신제 유래비’ 옆에 1988년 9월 12일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윤우식(남,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