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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203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목계교(牧溪橋)를 건너 목계마을로 접어들면, 왼쪽 산 바위 밑에 목계가 어떤 마을인지를 금방 알 수 있게 하는 비석군(碑石群)이 있다. 샛강에 다리를 놓아 제하공덕(濟河功德)을 칭송한 ‘밀양박공해성송덕비(密陽朴公海成頌德碑)’, 개인 재산을 털어 목계국민학교를 설립한 공을 기려 마을 사람들이 세운 ‘파평윤공해영송덕비(坡平尹公海英頌德碑)’를 비롯하여 목계마을의 유래와 목계 별신제, 줄다리기의 실제 내용을 담은 ‘목계 별신제·줄다리기 유래비’ 가 서 있다.

유래비는 화강암으로 깎은 거북 모양의 대석(臺石)과 대리석 비신(碑身),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사이에서 서로 다투는 형상의 화강암 이수(螭首)로 이루어졌다.

유래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목계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태백준령의 일지맥(一支脈)이 부흥산(富興山)에 이르러 솔밭과 강변이 어우러져 태고시(太古時)부터 큰 마을이 형성되어 뱃길로는 경도(京都)[서울]에, 뭍으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며, 내륙항구(內陸港口)로 물화(物貨)와 사람의 내왕이 끊이지 않아 항시 큰 저자를 이루니 팔도에 살기 좋은 5촌(五村)의 하나라, 5목계(五牧溪)라 불렸고, 경도(京都)와 해외(海外)의 신문물을 유입하던 중원문화의 발상지였다. 이에 남한강의 험한 뱃길의 무사안녕과 오곡풍성을 축원하기 위하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줄다리기와 별신제를 펼치니 강변 백사장에 수만 군중과 풍물패, 장사배들이 한데 어울려 천하제일의 장관을 이루었다. 줄다리기는 정월 초아흐렛날 대동제를 시발로 열나흘 날 뱃고사인 용왕제를, 이월 보름날 줄다리기로 끝이 난다. 별신제는 사월 초파일 나루터에 임시당집을 짓고 부흥당에 강신제와 영신굿 순으로 막이 내린다. 줄다리기는 뱃고사를 지낸 후, 동서양계(東西兩溪)로 나뉘어 아기줄을 시작하고, 차차 승벽(勝癖)이 커져 급기야 편장(偏將)을 세우고 이웃 동네에 청병(請兵)하여 짚을 모아 평산과 샘터산에서 각각 용줄을 드린다. 용머리는 칠 척에 메기수염을 달았고 용의 몸(龍身)은 백여 척에 상중석회를 붙였으니 마치 용이 살아 꿈틀거림과 같았다. 용줄이 산줄기를 타고 옮겨질 때는 꿩의 장목을 한 중앙 깃대와 풍물패를 선두로 남색기를 든 수줄꾼과 홍색기를 든 암줄꾼이 어깨에 메고 장군복을 한 편장(偏將)은 노란 띠에 공작모를 쓰고 별감, 통인, 책질, 여장복, 중복들을 호령하여 경계선에 이르러 치열한 선두 다툼 끝에 수줄이 앞서 백사장에 이르고 수삼일 후 비녀목을 지른 후 한판승부를 벌인다. 이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그 동안 정성을 다했던 줄을 한강물에 흘려보냈으니 아! 이는 임진년 탄금대신립장군과 장병들의 수중고혼을 위로함이 아닐런지. 별신굿은 항구도시며, 육로의 요람으로 반농(半農), 반상읍(半商邑)인 목계에 수호신을 모시고 장선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축원하는 대동제(大同祭)의 한마당이었다. 나루의 임시 당집에서 큰 무당과 사당패를 불러 영신굿과 관등놀이, 박첨지 꼭두각시 등을 펼치니 놀이의 대축제이다. 씨름과 난장판이 함께 벌어져 수만 군중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놀음을 하였으나나, 관에서는 이를 막지 않았다. 이제 줄다리기와 별신제가 면면이 이어오기 수백 년! 수천 단의 볏짚과 만금(萬金)을 아낌없이 봉사하고 수만 인파를 질서 있게 운용한 협동단결심을 오목계와 더불어 목계인의 자긍심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1984년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줄다리기가 재현되어 문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이에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삶의 역사의 현장을 길이 전하고자 동민들의 정성으로 목계인 김경렬이 돌을 구하여 부흥산 아래 이 비를 남기노라.

글 엮은이 우범성(禹范成), 1988년 8월 김경렬(金敬烈) 세움’

이 비를 세운 곳도 사유지였다. 1988년 동네 주민들이 서울에 거주하던 윤우식 씨의 형님을 찾아가 유래비 세울 부지를 부탁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형님에게 부지를 얻지 못하자 윤우식 씨에게 연락이 왔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목계 유래비를 세울 부지를 부탁하기 위해서 동네 대표 5~6명이 서울로 올라온다고 연락이 왔지. 연락을 받고 여러 사람이 올라오면 동네 돈을 축을 내는 것이니 며칠 뒤 볼 일을 보러 내려갈 일이 있으니 그때 보자고 하였어. 며칠 뒤에 내려와 마을 대표들을 만나보니 비석 세울 부지를 현재의 위치가 아닌 오른쪽 가로등이 서있는 곳에 네모반듯하게 세 평을 달라고 하였어. 나는 그곳은 어렵고 현 위치보다 왼쪽에 세운다면 허락하겠다고 말하고 서울로 올라왔지. 그런데 내가 서울로 올라간 사이 현재의 위치, 바위 밑에 세워놓고 제막식을 한다고 해서 내려 와 봤지. 비 앞면에 새겨진 목계 별신제, 줄다리기 유래비를 처음 보았지.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고사 지내는 것은 해마다 보았지만, 별신제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죠. 줄다리기도 그냥 그렇게 쓰면 안 되죠. 귀줄다리기라고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

유래비를 바위 밑에 세운 것이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된다. 가로등 쪽에는 덩그러니 쓸쓸하지만 지금 이곳은 병풍처럼 뒤에서 보호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보제공]

  • •  윤우식(남,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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