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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20304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목계마을에서 바라보면 남한강 건너 맞은편에 솔밭이 보인다. 언뜻 보아 200~400여 년 이상 됨직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충주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소풍을 오기도 하고 물놀이 장소로도 이용되던 소위 ‘목계 솔밭’으로 알려진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412-1번지 향천마을인 이곳에는 6·25전쟁 중에 지방 공산당들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된 반공지사들을 모신 ‘6지사의 묘’가 있다.

묘역에는 1977년에 세워진 ‘반공투사(反共鬪士)의 묘(墓)’라고 새겨진 비석은 뒤에 밀려 있고, 앞에는 이 비를 세우는데 후원한 ‘목계노인회(회장 우태원)’ 회원의 명단을 기록한 자연석으로 만든 큰 비석이 있다. 그 옆에는 1985년 당시 중원 군수였던 김지동의 지원으로 건립한 비석이 있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 대한의 자유 민주 수호를 위하여 반공 대열에서 젊은 날의 우국충정을 아낌없이 다 바치고 떼 지은 붉은 무리 삼천리 금수 강역을 동족상잔의 붉은 피로 얼룩지게 했던 六·二五 참극에 아깝게도 목숨마저 다한 이선규(李善圭) 목계국민회 위원장, 권중대(權重大) 동부위원장, 변용출(卞龍出) 동감찰부장, 김용기(金容琪) 목계 청년단장, 홍선식(洪善植) 동부단장, 박삼수(朴三壽) 동동원부장 제위의 무덤 앞에 삼가 이 비를 세워 살아서는 나라 사랑의 지성을 다했던 그 불요의 넋을, 죽어서는 조국 수호의 화신의 명복을 길이 기리고 손 모아 비는 뜻을 엮어 새기노니 이곳에 발길을 멈추는 뒷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반공의 마음과 몸가짐을 가다듬어 6지사의 남긴 뜻을 영세토록 잊지 않게 하여 재천의 영들을 위무코자 하노라(후면 내용)’

‘이 비는 대한 노인회 목계회장 우태원 외 회원 일동이 손수 갈고 다듬어 손창근(이) 조각을 一九七七年 六月 二十五日에 제막하였으나, 노후비로 인하여 철거하고, 서기 一九八五年 六月 二十五日에 김지동 중원군수님의 특별 배려로 재제막 하였음(4면 내용)’

다음은 6지사에 대해서 윤우식 씨, 윤태호 씨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엄정면 지역은 공산주의자 김삼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으나 목계마을은 사정이 아주 달랐다고 한다. 반공정신이 투철하여 마을 사람들끼리 ‘목계 국민회’를 만들어 마을의 대동단결과 마을 수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엄정면 일대는 소위 ‘지방 빨갱이’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6지사에 대해 다시 자세히 물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을 지사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방 빨갱이들이 죽일 사람으로 지목하면 죽게 되는 판이었지. 우리 집안은 주덕의 어느 산에서 잡혀와 20여 일 후에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어. 엄정면 사무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윤해영 씨)께서 제일 먼저 끌려 나갔지. 끌려 나간 아버지를 본 목계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을 죽인다면 이중에 안 죽을 사람이 있겠느냐?’ 라고 얘기하자, 재판을 맡은 사람이 ‘저 뒤에 가 있어’ 라고 하자 면사무소 숙직실에 들어가 20~30분쯤 지나자 ‘탕! 탕! 소리가 났지. 그때 모두 죽었어. 그때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를 수습하여 상여로 모셔 이곳에 안장하였는데, 1985년 중원군수의 지원으로 ‘반공지사 추모비’를 재제막하고 주변을 정비하였어” 라고 답해주셨다.

솔밭에 있는 6명 중 목계 사람이 다섯 사람이고 율릉리 사람은 홍선식 한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현재 6지사묘의 관리는 충주시에서 비용을 지급하고 있으며, 가금면이 이 비용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6지사묘 관리비는 허세욱 씨가 시의회 의장에 있을 때 처리되었다고 한다.

6지사묘 앞에 세워진 비석을 보면,

‘순국지사 이공 선규지묘(殉國志士 李公 善圭之墓)

순국지사 권공 중대지묘(殉國志士 權公 重大之墓)

순국지사 홍공 선식지묘(殉國志士 洪公 善植之墓)

순국지사 김공 용기지묘(殉國志士 金公 容琪之墓)

순국지사 변공 용출지묘(殉國志士 卞公 龍出之墓)

순국지사 박공 삼수지묘(殉國志士 朴公 三壽之墓)’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목계는 자존심이 살아있는 마을로 주변 지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보제공]

  • •  윤우식(남, 목계리 주민)
  • •  윤태호(남, 75세,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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