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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은 나에게 맡겨, 조일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30104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목계 정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목계1리 구회관이 나온다. 여기서 뚝방 길을 따라 더 가면 새터가 나온다. 이곳에는 외지인의 별장도 있는데, 조일상 씨의 집이 여기에 있다. 물론 별장 건물은 아니다.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가니 기다리고 계셨다. 목계마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조일상 씨가 부흥당 당고사의 축문을 쓰게 된 연유를 물어보게 되었다.

조일상 씨는 “제가 20여 년 전에 동네일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연로한 어른들이 축문을 쓰셨는데, 이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축문을 쓸까?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축문을 쓰시는 분을 찾아가서 말씀을 드리자, 그 자리에서 직접 쓰시면서 하나하나 일러주셨지요. 그런데 축문은 고사를 지내고 나면 불살라 버리기 때문에 보관본은 없어요. 그래서 어떤 마을에 가보면 동제를 지낼 때 축을 읽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 이유는 원래 축문이 없는 마을도 있고, 있었는데 누가 잘못 보관하여 분실한 경우 축을 읽지 못하는 마을도 있었답니다. 비록 저는 한문을 많이 공부하지는 못했고 조금 읽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글자는 반복하면서 모두 익혔지요. 그렇게 해서 축문을 쓰게 되었지요” 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부흥당의 서낭각시와 6지사 묘에 대해서도 조금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즉 부흥당에서 모신 서낭각시의 화상이 몇 번 바뀐 사실이었다. 조일상 씨에게 상세한 사연을 부탁드렸다.

“몇 번 바뀌었지요. 아주 옛날 것은 모르겠고, 목계 솔밭에 모셔진 6지사 중에 권중대라는 분이 있어요. 그 아들이 권태희라고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있어요. 6·25전쟁 무렵에 아버지(권용대)께서 화를 당하자 이사를 가서 소태면 야동초등학교를 졸업했지요. 지금 서울서 철학관을 운영하는데 원래 화가였어요. 그 친구가 그린 서낭각시도를 모셨다가 없어지고 고깔을 쓴 화상을 모셨다가 예전 모습과 너무 다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다시 그려다가 모시고 있어요” 라고 설명해주셨다.

마을 일을 묻다가 조일상 씨가 언제부터 동네에 사셨는지가 궁금했다. 이에 대해서 여쭈어 보자, “저는 여기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지요. 선대조께서 포천에 사시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7대 할머니께서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셨데요. 의용소방대 뒤 골목으로 들어가서 옛날 동계와 서계를 나누던 도랑(현재는 복개하였으나 표시가 남)을 따라 올라가 산등성이에 이르면 목계에 살고 있는 평양조씨(平壤趙氏)들의 선대 묘역이 있어요” 라고 말씀해 주셨다.

조일상 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선대 묘역을 돌아보겠다고 하였다. 어쩌면 목계에 꽤 오래도록 거주한 평양조씨의 묘역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둘러보기로 하였다. 목계의용소방대 뒤 골목길을 돌아 산으로 올라가니 바로 묘역이 나왔다. 꽤 오래됨직한 석인(石人), 망주석, 상석, 비갈(碑碣)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쪽에 있는 산소에는 비갈이 잘 남아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래에 있는 묘에는 비석이 부러져 밑 부분만 남아 있었다.

비갈은 네모진 대석이 있고 이수와 비신이 일석(一石)이며 이수는 구름무늬들이 어울려 있다. 비의 전면에는 ‘정부인 상주 김씨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조공 경운지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행’ 이라고 새겨져 있다. 후면에는 비 건립 연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만력 28년 경자 5월 자인행 입’ 이라고 새겨져 있다. 만력(萬曆) 28년(庚子)은 1600년이다. 따라서 조경운의 묘소는 약 400년 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정보제공]

  • •  조일상(남, 목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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