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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골의 뿌리를 찾아서-사라진 온수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10305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온수골에 대한 이야기는 온수골에 살다가 신석으로 이주한 박장석(76) 씨와 박철동(46) 씨를 통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온수골의 온수는 ‘따뜻한 물’이라는 뜻으로 동네 가운데 있던 샘물이 겨울에도 따뜻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온수라는 이름을 보고 외지에서 온천을 찾아보려 했지만 온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은 찾지 못했다고도 한다.

온수골은 운봉박씨들이 1700년대 마수리로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개척한 마을이다. 온수골가섭산을 등지고 들판 쪽으로 향하고 있어 마을의 입지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에서 논까지의 거리가 멀어 이동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츰 들판 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자연히 마제마을이 생겨났던 것이다.

온수골은 1982년까지 온수골과 상촌 2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온수골마수리에서 가장 전통이 있는 마을이었고, 그래서 운봉박씨 운봉군 중화를 모시는 사당인 성렬사가 처음에는 온수골에 만들어졌다. 온수골은 운봉박씨 씨족마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강원도 지역의 화전민들이 정부 정책에 의해 온수골 남서쪽에 정착 상촌(桑村)이라는 마을을 만들었다. 상촌은 ‘뽕나무 마을’이란 뜻으로 1960~70년대 한창 장려하던 양잠업을 위해 이 지역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온수골에 사람이 가장 많이 살았을 때는 1970년대로 상촌에 40여 가구, 온수골에 2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이 군부대에 수용된 1984년경에 모두 온수골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상촌에서 20여 가구, 온수골에서 20여 가구 정도가 가까운 내용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신석으로 이주한 가구는 네 가구에 불과하며 다른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다.

[정보제공]

  • •  박장석(남, 76세, 마수리 주민)
  • •  박철동(남, 46세, 마수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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